brunch

장래 희망이 뭐냐고요?

자식의 이번 생을 망치지 않으려면

by 자민

"수현이 아버지, 학생 기초자료 작성해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문자를 받자마자 두 손을 모아 답을 보냈다. 나도 모르게 공손해졌다.


은유 작가의 책에서 한 배우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다. '인터뷰를 하다 갑자기 기역자로 몸을 굽혀 전화기에 인사하는 배우' 이야기는 마치 내가 그 광경을 실제로 본 것처럼 기억에 남았다. 유명 배우도 제 아이 담임 선생님 전화를 받자마자 인터뷰를 중단하고 휴대폰에 인사를 하더란다. 담임 선생님 전화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인터뷰이를 상상하며 책을 읽다 피식 웃어넘긴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아아 나도 같은 처지가 될 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러게 웃긴 왜 웃어.)


무더위가 시작된 6월이지만 어쨌든 학교는 개학이란 것을 했고, 아이는 일주일에 단 한 번일지언정 등교라는 것을 해서 선생님과 반 친구들을 만난다.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 같다. 꽁꽁 얼어 있었던, 학부모가 움직여야 하는 각종 행정 업무도 서서히 풀려나온다. 스쿨뱅킹 계좌도 만들어야 하고, 예방접종 기록도 찾아내야 하고, 학생 상담용 기초자료도 제출해야 한다.


도대체 학생 상담용 기초자료가 무엇인가 하여 담임 선생님이 보내주신 서식을 보았더니 어딘가 아련하게 익숙하다. 어릴 적 생활기록부에서 많이 보아왔던 그것들이다. 취미와 특기, 학생의 진로 희망란과 학부모의 진로 희망란이 나란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가만있자... 취미와 특기는 요즘 좋아하는 것들 쓴다고 치고, 수현이 장래희망이 뭐였더라?


어쩌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평생 자기를 따라다닐지도 모를 중차대한 문서다. 아빠 혼자 써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와 머리를 맞댔다.


"수현아 나중에 뭐하고 싶니?"

"마인크래프트 하고 싶어. (요즘 매일 하고 싶다 노래를 부르는 그 게임이다.)"

"아니 그거 말고, 무슨 직업을 갖고 싶냐고."

"...?"


수현이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계를 보니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재워야 한다는 압박에 조급해진 나는 유도 질문을 던졌다.


"직업 말이야 직업.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너 예전에는 소방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싫어. 소방관은 불나면 죽을 수도 있잖아.”


"그럼 만화가는? 요즘 포켓몬 잘 그리잖아."

"나 그림 잘 못 그려."


"그럼 의사는?"

"수술하다 사람 죽일 수도 있잖아."


"그럼 비행기 조종사는?"

"나 고소공포증 생겼어."


"그럼 프로게이머는 어때? 게임 좋아하잖아."

"매일 하다 보면 중독돼."


아이의 입에서 '중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사실 조금 놀라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의 지적 수준을 은연중에 대수롭잖게 여기고 있었던가.


"그럼 별로 내키진 않겠지만, 아빠처럼 회사원은 어때?"

"싫어. 맨날 야근하잖아."

"..."


수현이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하기 싫은 것 위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내가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매일 야근하던, 매일 회식하던 내가.


육아휴직을 내고 매일 저녁 아들과 놀기 시작한 지 반 년째였다. 같이 포켓몬을 보고 신비아파트를 보고 실뜨기를 하고 색칠놀이를 하고 킥보드를 타고 축구공을 찬 게 나는 '벌써 반년이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에게 아빠는 여전히 '매일같이 야근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6개월이면 잊어줄 줄 알았는데. 오롯이 아빠만의 착각이었다.


장래희망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몇십 년 후 뭐가 되고 싶은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여덟 살 아이에겐 아득히 먼 미래다. 마흔 살 내게 "100살 되면 뭐하실 거예요?"라고 묻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다. 돌이켜보면 지난 내 인생도 어릴 적 생활기록부에 쓰여 있던 장래희망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서류 앞에 섰다. 그래 장래희망은 패스. 남은 건 '학부모 진로 희망'이었다. 아아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험을 들게 하시나이까.


종이 한 장을 두고 마음이 풍랑 맞은 배처럼 갈 곳 없이 헤매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원하는 대로 아이의 장래가 펼쳐진다면 그게 정상인가 싶다가도, 내 아이가 인생의 고통은 최소한으로 겪었으면 하는 마음이 조명등 불빛 아래 얽히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이 한 줄이 뭐라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 생각이 (안드로메다까진 아니고) 기본소득까지 가버렸다. 수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기본소득 제도나 잘 정착해있으면 좋겠다. 무상급식제도 덕에 도시락 걱정 안 하고 학교 보내듯, 기본소득만 있으면 먹고사는 건 문제없을 테니 뭐라도 하지 않을까. 그 시대가 되면 학생 상담자료에서 '학부모 진로 희망' 쓰느라 머리 싸매는 학부모는 사라지고 없을 테지.


생각은 정처 없이 흘러 흘러 아버지에게까지 가 닿았다. 아버지라면 뭐라고 썼을까...... 쓰긴 뭘 써. 소처럼 그렁그렁한 아버지 눈만 떠올랐다.


늘 그랬다. 생활기록부 학부모 희망란과 상관없이 아버지는 "난 너를 믿는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는 말만 반복하시곤 했다. 본인이 배운 게 부족해서 잘 모른다고. 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지 않겠냐고.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특목고를 가야 하나 일반고를 가야 하나 고민할 때도, 문과와 이과를 놓고 고민할 때도, 대학을 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유학을 갈 때도, 늘 그랬다. 아버지의 그 눈을 보고, 나는 안심하고 다음 선택지를 향해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들아, 뭘 그리 바라고 있어. 그냥 나처럼 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들이 나중에 무엇을 하든,
그저 옆에서 지켜볼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등굣길 아침에 살짝 장난기가 동했다. 이미 학생 기초자료는 아이 가방에 넣어둔 다음이었지만, 슬쩍 수현이 옆구리를 찔렀다.


"간밤에 하고 싶은 직업 혹시 생겼어?"

"...??"


"혹시 대통령은 어때?"

"너무 말 많이 해야 해서 싫어."


"ㅎㅎ 사진작가는 어때?"

"전국 돌아다녀야 하잖아. 엄마 아빠 자주 못 만나니까 싫어."


놀랐다. 수현이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구나. 나는 전생에 고슴도치였던 것일까. 아니겠지. 아이들의 눈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겠지. 부모들의 마음이란 원래 이런 것이겠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