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먼지로 돌아가지만
대여섯 쯤 되었을까. 수현이는 매번 왜냐고 묻기 시작했다. 세상사 모든 것이 궁금한 것처럼. 초등학생이 되니 뒤에 몇 글자가 더 붙는다. "왜... 꼭 그래야 하는데?"
자식 인생 부모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다. 양육의 의무가 있다. 아이의 의사를 거스르는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제가 싫더라도 밥은 먹여야 하고, 목욕은 시켜야 하고, 학교는 보내야 한다. 나름 '최소한의 개입' 원칙을 세우고 지키고자 하지만, 초등학생 아이 눈에 부모는 그저 이래라저래라 잔소리꾼일 뿐. 이 녀석... 아빠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열여덟 살만 되어봐라 집에서 뻥 차 버릴 테다 흥. 혼자 이를 갈며 아이의 책가방을 둘러멘 채 현관문을 나선다.
지난주에는 드디어 뻥 터져버리고 말았다. 등교 시간이 코앞인데 아이는 여전히 미적미적이다. 학교보다는 만화가, 놀이가 더 재미있는 아이에게 아홉 시 등교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인 게다.
"왜 꼭 아홉 시까지 가야 하는데?"
"학교는 원래 아홉 시까지 가야 하는 거야."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아홉 시를 훌쩍 넘은 시간에 아이를 교문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이 뒤통수가 사라지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집 앞 카페에 앉아 혼자 마음을 추스르며 읽던 책을 펴는데, 아아... 옛날 생각이 나버렸다.
중학교 때였다. 아침 자율학습시간에 (그러고 보니 이름이 '자율'학습이었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읽고 있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창가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느긋하게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밀당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가 툭툭 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선생님이 옆에 서 있었다. 신성한 자율학습 시간에 떡하니 소설책을 책상 위에 펼쳐 놓다니... 선생님은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자기 눈 앞에 벌어지기라도 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덮어!"
나는 깜짝 놀라 후닥닥 책을 집어넣었다. 사춘기 중학생의 그 식겁한 마음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자율학습 시간에 책 읽는 게 잘못인 건가? 뭐 깎아내리고자 한다면 통속 로맨스 소설이지만, 엄연히 세계문학사에 빛나는 수작 중 하나인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은 것도 아니고 쳇. (아니, 채털리 부인도 안될 건 또 뭔가?)
그러니까 나는, 자율학습 시간에 세계문학 정도는 읽어도 된다는 나름의 판단을 하고 있다 선생님께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그날 사건은 그렇게 나의 유년기를 끝내 버렸다. 남은 것은 본격적인 수험생의 삶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미뤄두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삶의 시작. 따뜻한 문학의 품 속에서 놀고 있다 거친 생존경쟁 속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달까.
그때, 당당하게 물었다면?
왜 꼭 그래야 하냐고.
왜 하기 싫은 것을 꼭 해야 하느냐고.
그랬다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엄지혜 작가는 <태도의 말들>에서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글로 풀어놓는다.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가장 적합하게 성격을 구성해놓았기 때문에, 수십 년간 살아온 사람에게 성격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한동안 나는 이 내용을 마흔이 넘은 사람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주장의 근거로 빌어다 쓰곤 했다. 아들 너는 내게 그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있구나. 뭐, 별 수 있나. 바뀌어야지. 아들이 원한다는데.
수천 년 과거를 다루는 역사도 까마득한 시간을 다루지만, 과학은 스케일이 더 무지막지하다. 얼마 전 들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수준이었다. 하나의 대륙이었던 세계가 수억 년간 아주 조금씩 움직여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중학생 때 알았던 상식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대륙은 정지해있는 것 같지만 지금도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고(당연히!), 다시 수억 년이 흐르면 지금의 오대양 육대주는 예전처럼 하나의 대륙으로 합쳐진다고.
수만 년, 수천만 년도 아니고, 수억 년 이후의 세계라... 내가 가진 시간관념으론 쉬이 가늠이 안된다. 수억 년과 사십 년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교차한다. 사십 년간 이뤄온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도 어쩌면 그간 걱정했던 것보다는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은 커피잔을 비운다.
아빠, 지구의 삶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참 금방이에요. 그렇죠? 곧 먼지가 될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전까지는 수현이와 잘 지내다 가겠습니다. 꼭 아홉 시까지 학교 안 가도, 하루 이틀쯤 목욕 안 해도, 그냥 살짝 눈감아주려고요. 동의하시죠?
‘아들 맘대루 혀’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