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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절간의 이별

손잡지 못하는 부모 마음이란 것

by 자민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십몇 년 전, 입대하던 그날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이 계절이었네. 적당히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던 초여름.


그 나이 때 어느 누가 그렇지 않을까만은, 군대에 가기 싫었다. 이리저리 미적거리다 제때를 놓치고 동기들이 모두 입대한 후에야 훈련소에 가는 날을 맞았다. 도대체 병무청은 무얼 보고 내 신체등급을 1급으로 판정한 것인가. 나보다 키 크고 건장한 친구들도 공익으로 잘만 빠지던데 왜 나는 논산으로 가고 있는가. 뭐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영등포역에서 대전행 무궁화호를 타던 기억이 난다.


본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아버지의 낡은 소나타를 탔다. 할머니가 손주 군대 가는 모습 보겠다고 동행했다.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오른쪽 뒷좌석에 앉으셨다.


대전에서 논산은 차로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시절이었지만 초행길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넉넉잡아 한 시간. 그 한 시간 사이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사소했지만, 잊히지 않는 사고.


집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계속 차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덜그럭 덜그럭. 곧이어 "끼익..." 하고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어라? 뭐지? 이러고 있는데 아버지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가 타이어를 보더니 트렁크에서 생전 처음 보는 도구들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타이어 한쪽이 터진 것이었다. 아버지 얼굴엔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도구들은 꺼냈지만 정작 한 번도 타이어를 갈아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차들은 위협하듯 옆을 쌩쌩 지나갔다. 아버지는 땀을 줄줄 흘리며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타이어를 계속 이리저리 만져봤다. 할머니는 죄 없는 자줏빛 저고리 고름만, 나는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만지며 아버지의 분투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왜 그 장면이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을까. 전에는 몰랐지만, 나는 타이어가 터진 것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남았던 것이다. 타이어를 갈려고 고군분투하던 아버지 마음이 슬쩍 드러났던 그 한 마디를.


"휴, 하마터면 우리 아들 죽일 뻔했네. 군대 보내다가."

그날 갓길에서의 싸움은 다 자란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치렀던 싸움이었던 게다.


아버지는 기어이 승리를 거뒀다. 아버지는 타이어를 가는 방법을 깨우쳤고, 간신히였지만 터진 타이어를 빼낸 자리에 스페어타이어를 대신 갈아 끼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제시간에 훈련소에 도착했고, 나는 운동장에서 아버지와 할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들이 코로나를 뚫고 얼마 전에 정식으로 입학을 했다. 첫 등교를 하는 순간 벅찬 마음에 가방 메고 계단을 오르는 아이의 뒷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왜 천신만고 끝에 등교하는 아이까지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냐는 지탄(?)을 지인들로부터 받았다. 본인은 선생님과 새 친구들 만날 생각으로 휘적휘적 뛰어올라갔을지도 모르는데.


손잡고 함께 교문을 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지만, 교과서가 든 가방을 들어보면 꽤나 무겁다. 혼자 그 가방을 멘 채 자기 반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그이의 모습을 아비 된 나는 교문 밖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 순간 군대도 못가보고 죽을 뻔했던 그날, 갓길 한쪽에서 쭈그려 앉아 나름 차려입는다고 입은 셔츠를 흠뻑 적신 채 타이어를 갈던 아버지를 보았다.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육아휴직의 힘은 강력하다. 자식과의 이별을 매일 아침마다 맞이하고 있다. 가끔은 학교 보안관 아저씨의 제지를 뚫고 짐짓 모른 척 함께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속에서 끓어오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 나절간의 짧은 이별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편을 택한다. 교문은 육중한 철문이지만 그래도 아직 틈이 넓어서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는 것을 너그러이 허용해준다. 수현이는 선생님이 건네주는 손 소독제로 손을 닦고 종종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아이를 보고, 아이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뒤돌아서다 그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하마터면 '천금 같은 자식을 황천길로 보낼 뻔했다'며 짐짓 농담처럼 말하시던 그 여름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채 제 자식 머리끝이 운동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을 그날의 당신을. 그저 그나마 제 어미와 함께였어서 그 마음 조금이라도 덜 헛헛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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