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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릴 수 없는 슬픔

6월 29일의 또 다른 의미

by 자민

조깅을 시작했다. 조깅이라니! 원체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인생이다. 지인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지만, 그저 좀 더 살려는 몸부림이라고 해 두자. 어쨌든 조금씩 횟수와 거리를 늘려가고 있다.


내 몸에 맞는 형태의 뜀박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다양한 형태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무심한 표정을 한 채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마라톤 클럽 어르신들을 보면 냉큼 비켜드리고 뒤에서 나긋나긋 뛴다. 괜히 이분들 따라붙었다간 오버페이스해서 오백 미터도 더 못 뛴다는 것을 안다. 무모한 도전을 했던 어느 날 이후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조끼 입은 분들을 보면 생각한다. '아 신선님들 오셨네. 존경.'


몇 달 뛰다 보니 자연히 에어팟을 끼고 뛰게 되었다. 무언가 다른 소리가 귀에 들어오면 달리기 초보자로서 어쩔 수 없이 내뿜는 숨 가쁜 소리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된다. 여러 종류의 음악과 오디오북, 팟캐스트를 시험하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이슬아의 이스라디오>를 번갈아 듣는 걸로 패턴이 정착됐다. 장년과 청년, 음악과 낭독의 조합이랄까. 팟캐스트를 켜고, 준비운동을 하고, 레디, 셋, 고. 얼마간 등에 땀이 차면, 그때부턴 뛰고 있다는 것을 잊는다. 흘러나오는 이야기 속에 서서히 정신을 빼앗긴다. DJ들이 부리는 마법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6월 30일, 한 해의 절반을 지나던 아침이었다. 팟캐스트다 보니 전날 방송을 듣게 되므로, 그날 아침 귀에 걸린 것은 하루 전인 6월 29일 방송이었다. '철수는 오늘'이라는 코너를 들으며 설렁설렁 뛰다 그만, 턱 멈춰 서고 말았다.


배철수 DJ는 낮게 읊조렸다.
너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뛰고 있느냐
묻는 것만 같았다.


이야기는 박진주라는 작가로부터 시작했다. 한국식 이름보다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펄벅. 대학 시절 펄벅재단과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평소보다 좀 더 귀담아듣고 있는데, '배캠'은 펄벅의 글을 빌어 '달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 그것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속에 묻고 있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꿔놓으며 그 자체로 삶이 되기도 한다.

사라지는 슬픔은 달랠 수 있지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은 영원히 달래지지 않는다."


배캠이 펄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25년 전 6월 29일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기억이었다. DJ는 말한다. 한 세대 가까이 지나며 많은 이들의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졌지만, 어디선가 '슬픔을 감당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달래지지 않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그들에게 오늘은 여전히 가슴 아픈 하루일 것이라고.


그렇네. 함께 기억해주지 못했다. 남 이야기가 아닌데.


25년 전 6월 29일, 하필 그날 아버지는 서울에 있었다. 아마도 거래처 출장이었을 것이다.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TV를 통해 전해 듣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늘 서울로 출장 간다던 기억이 퍼뜩 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추억의 ‘삐삐’, 무선호출기도 없었는지 그날 늦게서야 전화가 됐다. 일 때문에 바빴던 아버지는 꽤 나중에 사고 소식을 접했단다. 그는 사고 현장에서는 꽤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연신 괜찮다며 가족들을 안심시켰고, 내 아버지는 곧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순간 철렁했던 중학생 마음은 그렇게 가라앉을 수 있었고, 삼풍은 곧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땐, 언제까지고 남의 이야기로만 남을 줄 알았지.


사람으로 사는 이상, 언제고 한 번은 소중한 존재와의 이별을 맞닥뜨리게 된다. 부모형제든, 절친한 벗이든, 혹은 반려견이든. 당장 이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뿐이다. 영원히 내 옆에 있길 바라는 마음은 자연의 순리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언제고 배반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곤 그 이후론, 살아간다. 가슴속에 달래지지 않는 슬픔을 안은 채.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속 스스로 일깨우는 것뿐 아닐까. 지금 이 순간 눈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것, 물성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 느끼고 만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고. 이러한 슬픔이 나 혼자에게만 오는 것은 아니며,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언제고 적어도 한 번은 겪게 될 슬픔이라는 사실이 작게나마 위로가 될까.


엄마 얼굴을 보아하니, 오늘도 썩 위로가 되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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