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보며 애니 보기 3 - 쿵푸 팬더(2008)
"아빠 쿵푸하자"
아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며 자세를 낮춘다. 이건, 그렇다. 결투 신청! 남자 대 남자로 싸우자는 거다. 쿵푸를 언급한 건 그저 나이 좀 더 먹은, 늙어가는(?) 아비에게 자기 나름의 예의를 최대한 갖춰 표하는 것일 뿐.
태어날 때부터 쿵푸를 알았을 리 없다. 아이는 미디어의 영향을 받았다. 하릴없이 넷플릭스 화면을 넘기다 발견한 영화 <쿵푸팬더>. 한창 한 살 터울 사촌동생과 치고받고 놀기 좋아하는 아이에게 쿵푸는 그야말로 환장할 만한 콘텐츠였다. 게다가 자기가 배운 태권도보다 좀 더 있어 보이는 기운까지... 완전 자기 취향이란다. (아들, 그래서 네 작은할아버지들이 젊을 때 그렇게 홍콩 비디오를 봤다지... 근데 비디오가 뭔진 아니?)
<슈렉>과 함께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쿵푸팬더>는 뚱뚱한 팬더 포의 성장담이다. 멋지고, 날렵하고, 잘 싸우는 쿵푸 고수들은 조연으로 내려가고, 쿵푸를 배워본 적 없는 국숫집 아들인 포가 주연으로 나선다. 포는 어려운 환경에도 쿵푸 고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식 수련생이 아니었으나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활용한 집중 수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을 바탕으로 포는 '용의 전사'로 환골탈태, 메인 빌런인 타이렁을 물리친다.
오랜만에 보다 보니 '인생에 특별한 비법은 없다'는 핵심 주제의식, 그리고 캐릭터들의 화려한 쿵푸 액션 외에도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를테면 동료와 팀, 그리고 멘토 같은 것들.
포는 보잘것없는 국숫집 아들이다. 쿵푸 고수들을 아이돌처럼 좋아하는, 쿵푸를 애정하는 마음만 크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수련생들과 같이 쿵푸 연습을 하게 되었지만, 한참 뒤처진 채 시작하는 포가 수년간 누적된 훈련량을 따라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포는 어쨌거나 주인공이고, “용의 전사"로 선택받은 몸이다. "좋아하는 음식은 백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는" 자기만의 능력을 바탕으로 학습곡선을 빠르게 올려간다. 어라, 그러면 다른 팀원들은? 용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 수년간 피나는 수련을 해온 타이그리스, 크레인, 바이퍼, 몽키, 그리고 아이의 최애 캐릭터 맨티스는? 그냥 새로 들어온 포가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감싸주면 되는 건가? 포도 새로운 팀에 적응하느라 고생이지만, 기존 멤버들도 융화가 쉽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혼자 슬쩍 심기가 불편해져 있는데, 라디오에서 BTS가 그 마음을 화라락 풀어준다. 아아. 역시 BTS, 괜히 빌보드 1위를 밥먹듯 하는 게 아니구나.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BTS가 특별출연을 한 날, 배철수 아저씨가 BTS에게 묻는다. 자신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는 누구냐고. 언뜻 평범해 보이는 질문에 멤버들은 이렇게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진짜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 BTS 멤버들이에요. 이 친구들 덕분에."
"저 또한 그래요. 멤버들 때문에..."
"저도 좀 비슷해요..."
"아무래도 저는 멤버를 베이스로 하고... "
<쿵푸팬더>도 까놓고 보면 6인조 (혼성) 아이돌 그룹과 다를 게 없다. 재기 발랄한 청춘 예닐곱 명이 한 팀이 되어 같은 길을 걷는다.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까.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멤버들 간의 갈등은 사실 어느 조직, 어느 팀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짧은 라디오 방송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BTS 멤버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애정과 감사를 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팀원들 간의 격려와 배려가 팀의 성장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선순환의 결과를 이렇게 보고 있다.
그러니까, 타이그리스와 크레인과 바이퍼와 몽키와 맨티스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마음속 경쟁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갖고 있는 존재들인 거다. 새로운 멤버를 통해 자신과 팀의 성장까지 연결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친구들. 그 정도 역량이 있으니 시푸 사부가 '무적의 5인방'으로 결성한 것이겠지만. BTS에게도 방시혁 프로듀서가 그런 역할을 했겠지 싶다.
Everybody is Kung Fu Fighting
Your mind becomes fast as lightning
Although the future is a little bit frightening
It's the book of your life that you're writing
모두가 쿵푸를 하네
네 마음은 빛처럼 빠르게 될 거야
미래는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
이건 네가 쓰는 네 삶의 책이야
영화를 다시 보며, 쿵푸 팬더 OST가 이렇게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새삼 느낀다. 그래, 세상 모든 일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좋은 멘토가 있다면 그 속도가 빠르게 배가되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포에게 시푸 사부가 그랬던 것처럼.
먹는 것만 좋아하는 포가 쿵푸 고수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시푸 사부'라는 좋은 멘토의 힘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배우는 이가 좋아하는 것을 잘 관찰하고 적절한 방법을 맞춰 제안해주며, 지속적으로 배움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
시푸 사부의 모습을 보며, 어떤 아빠가 되어야 할지 떠올려본다. 아이에게 혼자 모든 걸 다 해내라고 방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무난히 할 수 있는 것인데도 괜스레 간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내가 미처 세심히 관찰하지 못해서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시푸 사부가 사는 인생의 목적은 스스로 '용의 전사'가 되는 데 있지 않았다. 한때는 자신도 고수였지만, 지금은 자신이 '용의 전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은 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청출어람의 순간뿐이다.
여덟 살 아이에게 아빠는 늘 넘어서야 할 도전의 대상이다. 아빠는 아들에게 인생 최초의 사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는 부단히,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에게 결투(!)를 신청하며,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차이를 극복하고자 하려는 것일지도.
때가 되면, 아이는 아버지를 넘어서는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포가 시푸 사부를 넘어섰던 것처럼, BTS가 방시혁 PD를 넘어섰던 것처럼.
나보다 더 성장한 이를 마주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 행복을 예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삶이지 않은가. 쿵푸 고수가 아니더라도, 음악적 재능이 없더라도, 아빠로 오늘을 산다는 건 어쩌면 축복과 같은 일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