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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승무원이 아니다

by 작중화자

“오늘은 어디에 있어?”

나는 이 질문을 참 좋아한다. 어제는 한국, 오늘은 다시 두바이, 내일은 스페인에서 아침을 맞는 날들이 있고, 호텔의 창밖으로는 매번 다른 계절의 풍경이 펼쳐진다. 잠자리가 수시로 바뀌고,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이 동으로 서로 날아다니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국경과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는 특권이 이 직업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유니폼은 또 어떤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슈트케이스를 끌며 공항을 마치 런웨이처럼 걸어가는 승무원에게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모인다. 유니폼은 승무원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그렇기에 항공사 공채 소식이 떴다 하면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일 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선망의 직업인 승무원이 나의 꿈은 아니었다.




나의 20대는 방송국에 있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KBS의 한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보조 작가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로 얻은, 직업 체험에 가까웠던 한 달간의 인턴이 끝나면 학교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팀에 남을 것을 자처했고, 마침 보조 작가가 필요한 상황이라 어렵지 않게 방송국에 눌러앉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방송국은 늘 나의 꿈의 무대였기에 이 새로운 시작은 필연과도 같았다. 그리고 젊은 날의 패기와 열정을 끌어 모아 나의 20대를 말 그대로, 방송에 갈아 넣었다.


나는 ‘진짜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방송은 내게 1순위도 아닌 0순위였고, 잘하고 싶은 만큼 최선을 다했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프리랜서인 탓에 야간수당도 없이 최저시급도 안 되는 돈을 받았지만 그것이 내 목표를 좌절시킬 이유는 되지 않았다. 한평생 쏟을 수 있는 열정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절반 이상을 방송에 쏟았으리라.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욕심이 컸던 만큼 번아웃은 빠르게 찾아왔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면서 나는 5년 만에 방송을 관두게 되었다.

내가 미처 가보지 못한 프로그램들이, 내가 전할 수 있었을 이야기들이, 어쩌면 잃지 않았을 문장들이, 퇴사를 하던 그 당시에는 눈에 밟히지도 않았다. ‘다들 관둬도 너는 계속 방송할 줄 알았다’는 동료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송국을 떠났다.


앞으로 나는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고 싶을까?


방송을 관두고 나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끝에 외항사의 승무원이 되기로 결정했다. 서비스 경력을 쌓기 위해 다시 2년여를 호텔에서 일하며 틈틈이 항공사 면접을 보고, 서른에 입사한 곳이 지금의 항공사다.


여유는 사치이기만 한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상이 두바이에는 있었다. 온전한 휴일이 있고, 그 휴일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는 즐길 거리들이 도처에 넘쳐났다.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반쯤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클럽과 라운지에서는 유명 DJ들이 초대되어 공연을 했고, 사람들은 클럽에서, 별장에서, 선상에서 연일 파티를 벌였다. 해변을 따라 들어선 리조트에서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누워 태닝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제트스키를 타고 먼바다로 향했다. 주말에는 사막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하늘에는 가끔 유성우가 떨어졌다.


한 없이 자유분방한 도시 같으면서도, 새하얀 칸두라를 입은 남자들과 검은색 아바야를 입은 여자들이 있고, 하루에 다섯 번 모스크에서 기도 소리가 들려오는 이곳에서, 나는 멀리 떠나 왔음을 인식할 때마다 전율이 차올랐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승무원이라는 직업도 한국에서 하던 일에 비하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해가 지날수록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한국에 갈 때마다 ‘현타’가 왔다. 나의 일상을 부러워하던 친구들이 회사에서 승진을 하고, 연봉이 인상되고, 하나 둘 결혼을 하더니 부모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못 견디게 허무했다. 나의 세계는 허상 같았다. 허상에 갇혀 스스로 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이내 공포가 되었다.

진급은 물론이고 결혼은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걸까.




쉬운 길을 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미 온 만큼의 길을 앞으로 더 가야 한다는 막막함에 짓눌리고, 내 능력에 번번이 실망하면서, 스스로를 혹사하던 생활을 끝내고 싶었기에 무의식 중에 보다 편한 일을 찾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선 내가 열심히 한들 조기진급은 없다. 때가 되면 동기들과 다 같이 진급하는 것이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다. 그러다 보니 굳이 온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더 이상의 목표가 없는, 열정이 없는, 권태에 빠진 삶은 괴로운 것이었다. 무기력에 허덕이다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에 이르렀다.


한국을 벗어나면 무언가 좀 다를 거라고 기대했는데 굉장한 착각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결국 다 똑같다. 그저 결이 다른 어려움이 있을 뿐이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을 찾지 못하면 어디에 있든 똑같은 처지가 반복될 뿐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한 많은 질문들 중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꿈은 승무원이 아니었다. 승무원은 직업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을 훌쩍 넘어서야 나는 내가 늘 창작하는 사람들을 동경했으며, 학창 시절 친구와 함께 소설을 쓰던 날들을 그리워했고, 한 작가의 말처럼 ‘무엇을 써야 할지는 모르면서 잘 쓰고 싶은 욕심’에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내 젊음을 착취하며 만들던 방송이 아니라, 단 한 줄이라도 내 언어에 온전한 외피를 두르기 위해 분투하던 그 치열함을 사랑했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입사 7년 차, 나는 여전히 비행을 하고 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이제 나의 comfort zone(안전지대)다. 나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먹고사는 일은 현실임을 자각한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일에 뛰어들기에 나는 더 이상 20대의 패기를 갖고 있지 않다. 매달 은행계좌에서 빠져나가는 대출금과 카드결제대금 내역이 잔인하게 현실을 상기시킨다.


혹자는 내가 용기가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의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괴롭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씩 여백을 채워나가는 일뿐이다. 언젠가, 꿈은 아니었지만 안전지대가 되어준 이 직업이, 타지에서 보낸 계절들이 고통만이 아니라 내 글의 자양이 되어주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끝.




*저의 첫 번째 브런치북 <사막의 끝, 승무원의 하늘에서>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곧 두 번째 브런치북과 매거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도 펜과 종이의 가호를 받는 온화한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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