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need a hug?"
점프싯(Jump seat, 이착륙 시 승무원이 앉는 접이식 좌석)에 나란히 앉아 한참 얘기를 나누던 Karina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No, I'm ok.” 괜찮다며 거절하는데 울컥, 뜨거운 게 터져 나왔다. 우리는 이제 막 착륙했고, 좌석벨트등이 꺼지며 짐을 꺼내는 승객들로 기내는 분주해진 참이었다. 그동안 많이 참고 있었구나 싶게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고, 당황한 나는 사람들이 볼까 급하게 갤리로 들어갔다.
비행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버티고 있었는데 최근 며칠은 그것조차 어려웠다. 진급탈락통보를 받으면서부터다.
입사한 지 이제 6개월밖에 되지 않은 Karina에게 회사에 대한 불만과 함께 신세한탄을 했는데, 그런 내가 그녀가 보기에도 많이 지쳐 보였나 보다. 오늘 비행에서 처음 만난 동료의 걱정 어린 한 마디는 아슬아슬하게 부풀어 오르던 감정을 터트리고 말았다.
Karina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다가오는 다른 크루를 물리고 조용히 티슈를 건네며 나를 다독였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린 이 상황이 민망했지만, 요란하지 않은 그녀의 위로가 고마웠다.
나는 내 불안을 끌어안는다. 이 불안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크고 작은 불행이 찾아올 때, 나는 웬만하면 혼자 삭히고 혼자 해결한다. 매번 누군가에게 징징댈 순 없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별 걱정도 고민도 없이 산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내가 너에게 솔직하지 않다고 해서 나의 세상이 꽃밭은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늘 강한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내가 동료들 앞에서는 서슴없이 속내를 털어놓곤 한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 나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너에게 나는 오히려 가장 나약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아직 1년 차 햇병아리이던 시절 함께 비행한 Cabin Supervisor(부사무장)을 기억한다. 케냐에서 온 그녀는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갖고 있었고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서비스가 끝나고 우리는 어김없이 갤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사이, 그녀는 흥분한 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여동생이 죽었어.”
이 한 마디에 나와 옆에 앉아 있던 동료는 숨을 죽였다.
나이차이가 스무 살 가까이 나는 막냇동생이 얼마 전 지병으로 가족의 곁을 떠났다고 했다.
“내가 딸처럼 키운 애였어. 아니 나한테 딸이나 마찬가지였어.”
그녀는 ‘My baby girl’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소중한 존재였는지, 몸은 약했지만 누구보다 강하고 어른스러웠던 동생을 얼마나 아꼈는지 숨도 쉬지 않고 토해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가족들과 떨어져 비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얼굴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그녀에게 그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그녀를 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나 이제 화장실에 가서 좀 울고 올게.”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뜨는 그녀의 고통은 오로지 그녀의 것이었지만, 가족과 떨어져 홀로 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생을 인내하며 산다. 마냥 행복한 이도, 늘 불행하기만 한 이도 없다. 저마다 문제 하나쯤 끌어안고 씨름 중이다.
내 또래의 한 동료는 부끄럽다는 듯이 운을 떼었다.
"얼마 전에 투자사기를 당했어."
처음에는 투자한 만큼 수익금이 꽤 잘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조금씩 액수를 늘려 돈을 넣었고,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만두려고 했을 때는 원금도 회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전형적인 투자거래사기에 당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5천만 원이 넘는 돈을 잃었다. 그는 세 명의 자식을 둔 가장이었다.
누구보다 자책하고 있을 그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들어주는 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의 대나무숲이 되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태연한 모습 뒤에 어떤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의 생이 무너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장막 너머를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고통을 껴안아준다.
이 비행이 끝나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응답한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우리가 나누는 포옹은 가장 따뜻한 응원이 된다. 그렇게, 너와 나, 이방인인 우리는 서로의 대나무숲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