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시끌벅적한 비행을 한 날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독 헛헛하다. 비행 중에 오고 간 농담과 장난들이 실없이 입꼬리를 잡아당길 때, 내 안의 허기 같은 공허는 오히려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긴 다음날이나,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출근하는 직장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집에 가던 때의 허무함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친척들이 왔다가 후루룩 떠나고 난 빈 집에 남겨졌을 때의 허전함에 가깝다.
공간을 가득 채우던 온기가 식어가면서 전보다 더 쓸쓸해지는 따뜻함의 상흔.
소란 뒤에 남겨진 무거운 적막. 사람이 들었다 난 자리는 그렇게 선명하다. 갯벌의 표면에 남은 썰물의 흔적처럼 꽤나 깊고 날카롭게.
그렇게 누군가의 온기는 상처가 된다.
6살의 어느 날, 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다시 일터로 향하던 아빠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아빠의 등이 골목 어귀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서른이 넘었다고 다르진 않다. 귀국하는 엄마를 공항까지 배웅하고 혼자 돌아온 집에서 나는 한 사람의 짐이 있었던 자리를 아리게 느낀다. 그 빈자리가 생채기라도 된 듯이 말이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적응되지 않는 감각을 애써 껴안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부터 나는 회식이 좋았다.
남의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 방송국은 반쯤 정신이 나간 이상한 사람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언제나 유쾌했다. 퇴근시간이 언제든 상관없이 방송국 앞 포장마차나 치킨집에서 동료 작가, 연출팀과 술을 마시곤 했다. 어떨 때는 다른 팀 회식에도 기웃거렸으니 이만하면 ‘프로 회식참석러’라 할 만하지 않은가.
체력만으로도 빛나던 20대의 나는 사회초년생의 고단함을 동료들과 함께하는 술로 다독였다. 그러다 주량을 훌쩍 넘어서는 날에는 어김없이 필름이 끊겼고, 다음날 아침 시큼한 토 냄새와 함께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하이킥을 차며 일어났다. 내 청춘의 지질한 단상이다.
하지만 승무원이 된 후로는 회식의 즐거움을 잊어버렸다.
매 비행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다르고, 비행이 끝나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기 때문에 ‘회식’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체류지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지만, 이미 비행에서 수백의 승객들을 상대하고 난 뒤의 피로감 때문에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원하는 승무원들도 많다.
어쩌다 마음이 잘 맞는 동료라도 만나면 같이 맥주 한 잔 하기도 하는데 그런 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국적은 다르지만 사람의 일이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행 중에 못다 한 속사정을 듣다 보면 동료애 이상의 친밀감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뿐이다. 외노자의 삶은 각자도생이고, 외로움과의 끝없는 대치다. 누군가를 만나 허전한 속을 채우고, 바닥이 드러나면 다시 채우는 일을 반복한다. 순간의 외로움을 채워주던 따뜻함이 나중에는 상처가 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회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고락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과 한 울타리 안에 계속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 꽤 중요한 일인 것이다.
피상적인 두바이의 인간관계 속에서 이런 소속감,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비행 중에 아무리 둘도 없는 절친처럼 굴어도 랜딩하고 나면 각자 슈트케이스를 끌고 돌아설 뿐이다.
두바이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시 정차하는 간이역 같다. 조금은 화려한 간이역이랄까. 애초에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도 힘들지만, 친해졌다 싶으면 다들 두바이를 떠난다. 그래서 아직 이곳에 남아있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인연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 인연이라도 없었다면 나의 타지 생활은 지금보다 더 암담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