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공고히 하는 것은 얄팍한 지식으로 무장한 오만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순, 하나의 인격체를 자신의 저울로 측량하여 판단하고, 편견이 굳어진 확신을 진실로 떠받드는 편협함.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 또는 인정하지 않는 오만.
그렇게 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내가 재직 중인 항공사는 중동 최대의 글로벌 항공사로, 그 명성에 걸맞게 직원 수는 6만 명 이상, 국적도 170여 개에 이른다. 말 그대로 전 세계에서 모인 직원들이 내 동료인 것이다. 국적과 인종뿐 아니라, 언어, 문화, 종교, 또한 성정체성도 다르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양성의 존중’이다. 나의 화두 역시 다르지 않은데, 그건 바로 ‘직시(直視)’다.
‘직시(直視)’의 사전적 의미는 -1. 정신을 집중하여 어떤 대상을 똑바로 봄 2. 사물의 진실을 바로 봄-이다. 내 앞의 선 개인에 어떤 조건을 붙이지 않고 똑바로 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늘 애를 쓰는 부분이다.
문제는, 오직 개인의 의지로만 직시가 가능하며, 상대의 고유성을 존중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지언정 직시의 주체가 되어야 할 그의 의지까지는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뿌리를 내린 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인은 영어를 못 할 것이라던가,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다 할 것이던가, 산수를 잘할 것이라는 등 나 역시 누군가의 고정관념과 마주치는 일은 늘 발생한다.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이면 당연히 중국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태닝을 좋아하면 ‘한국인답지 않은’것이 된다. 실제로 나는 태닝을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한국인이 맞냐는 질문을 받았다.
선입견의 대상이 되어 예고도 없이 무례한 언행을 겪게 되었을 때의 상처는 꽤 오래 남아 나를 괴롭히곤 한다. 나는 비교적 내 의사표현을 분명하게 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당하는 차별적 언사에는 굳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왜 누군가의 무례와 몰이해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에 이불을 걷어차며 스스로를 탓한다.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편견과 차별이 만연한 환경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피해망상이 생긴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이거 지금 차별 맞지? 나 싸워야 하는 거지?' 신경이 곤두서면서 감정 소모하는 날이 허다하다.
우리 회사의 동양인 승무원들은 속된 말로 기가 센 경우가 많은데, 나처럼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날을 세우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나만 늘 ‘피해자’이겠는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몰지각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길에서 양산을 쓴 흑인을 본 일이 있다.
‘흑인에게 양산이 왜 필요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혼자 키득거렸는데, 뒤이어 내가 얼마나 단순한 사고를 가진 사람인지 깨달았다. 무자비한 중동의 태양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뜨겁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는 누구든지 그늘을 찾게 되는데 흑인이라고 저 태양이 뜨겁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인간 생리에 대한 얕은 이해와 인종적 다름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었다.
(얼마전 한 흑인 틱톡커가 양산을 쓰는 동양인들은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거라는 황당한 발언을 했는데, 양산을 쓴 흑인을 보고도 같은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비행 중 있었던 기억나는 일화도 있다.
이 날 나는 라운지(항공사가 보유한 에어버스380의 비즈니스 클래스에는 다양한 주류와 간식을 제공하는 라운지 바가 있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배정된 휴식시간이 끝난 뒤에 돌아오니 립밤과 파우더팩트, 핸드크림이 라운지 한편에 놓여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라운지를 맡았던 동료가 챙기는 걸 잊었나 싶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비행시간 동안 틈틈이 주인을 찾으려 나를 제외한 6명의 비즈니스 클래스 ‘여성’ 승무원들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결국 두바이에 착륙할 때까지 주인을 찾지 못했다.
조금은 곤란한 마음으로 분실물을 챙기던 그때, 누군가 자기 물건을 보지 못했냐며 내게 물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딱 한 명 있던 남성 승무원이었다. 아차 싶었다. 동성애자인 그 동료를 간과한 것이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물건들이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치부했던 것이다. (참고로, 우리 회사에는 성소수자들이 아주 흔하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던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하면 말 다했다. 내가 종종 ‘언니’라고 부르는 이 동료들은 스킨케어에 누구보다 진심인 경우가 많다.)
나는 솔직하게 나의 오해를 고백했고 우리는 서로 깔깔대며 웃었다.
단정과 확신이 동반하는 폭력을 잊지 말자고 늘 생각한다.
로스터(비행스케줄)에 올라온 승무원명단을 보면서 특정 국적의 동료들에 대해 출근하기도 전부터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저 나라 애들은 게을러서, 싸가지가 없어서, 저 나라 애한테 인종차별을 당한 기억이 있어서’ 등등의 이유로 국민성 또는 국적으로 퉁 쳐서 한 개인을 판단하는 것이다. 경험상 불쾌한 예감이 들어맞을 때도 분명 있지만, 나의 색안경 쓴 확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동료들도 많다. 그리고 은연중에 내가 주었을 미덥지 못한 시선과 날 선 말들이 그들에겐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늘 직시의 어려움을 느낀다. 내가 아는 것을 의심하고 애써 이해하려는 수고로움마저 없다면 편견에 가득 찬 인간이 되고 만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확신되고 단언되는 대상이 되고 싶지 않듯이 사람을 제대로 보자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