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4월 17일이었다.
지하철 차창 너머 멀어지는 풍경 속에는 벚꽃이 아직 남아 있었고, 산하는 신록의 푸르름으로 반짝였다. 수성동 계곡에는 복사꽃잎이 수줍게 내려앉는 찬란한 봄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으로 짧은 휴가를 와있던 나는 만개한 4월을 만끽하고 있었다.
두바이의 폭우 소식을 듣고 불안해지기 시작한 건 이틀 전부터다.
비가 귀한 두바이에 하루 동안 일 년 치 강수량의 두 배가 넘는 비(약 250mm)가 내려 도시뿐 아니라 공항도 마비된 상태였다. 중동의 허브인 두바이 공항은 침수피해로 결항이 속출했다.
물에 잠긴 활주로에 항공기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영상과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을 헤치며 힘겹게 슈트케이스를 끌고 가는 모습이 SNS를 통해 빠르게 퍼졌다.
나는 돌아가는 항공편에 차질이 생길까 예정보다 일찍 두바이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미 하루 전, 발권을 거절당했기 때문에(만석이 되면 직원티켓으로 예약한 항공사 직원은 탑승을 못 할 수 있다.) 내 불안은 최고로 치솟은 상태였다.
자사 항공편에서 좌석점유율이 비교적 낮은 항공편을 예약한 나는 문제없이 체크인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인생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
앞서 출발 예정인 항공편이 3시간 지연되면서 그 비행에 타야 하는 승객들이 내 비행으로 바꿔 수속하기 시작했다. 좌석은 빠르게 차기 시작했다. 똥줄이 탔다.
결국 이번에도 비행기에 타지 못했다. 체크인카운터 직원에게 다음 편에라도 태워달라고, 당사 직원은 태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절박한 마음으로 사정했지만 그는 별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늦어도 다음날 저녁까지 두바이에 도착하지 않으면 출근을 못하게 된다! 직장인은 패닉에 빠졌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침 8시에 마닐라를 거쳐 두바이로 가는 경유항공편을 Full Pay로 예약했다. 항상 할인티켓으로 여행하는 승무원에게 ‘전액 지불’이라니! 쓰리는 속을 부여잡고 차가운 공항 의자에서 밤을 지새운 나는 겨우 마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던가.
인천과 마닐라에서의 출발지연, 두바이공항 기능 마비로 예정보다 네 시간이나 늦게 이민국을 통과한 나는 수하물을 찾는 곳에서 또 한 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전광판의 정보는 업데이트되지 않아 사람들은 어디서 짐이 나오는지 알지 못한 채 이 벨트 저 벨트로 뛰어다녔고, 주인 잃은 짐들이 한 편에 줄지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6시간 만에 짐을 찾았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두 시간 만에 짐을 찾은 나는 공항에서 차로 5분 거리를 6배가 넘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는 택시기사와 싸우며 겨우 집에 도착했다.
한국집에서 출발한 지 32시간 여 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코니에서 넘어온 빗물로 집은 엉망이었다. 대충 짐을 풀고 침대에 무너진 나는 세 시간 뒤, 출근했다.
누가 더 고생했는지 겨루기라도 하듯 승무원들 사이에 홍수로 인한 고생담이 터져 나왔다. 물이 차오르는 출근버스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했다든지, 이륙하지 못하는 비행기 안에서 수 시간을 대기했다든지, 퇴근할 방도가 없어 회사에 발이 묶였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례적인 홍수의 이유를 찾느라 분주했다. 어떤 이들은 UAE가 20년도 전부터 시도한 Cloud seeding(인공강우)를 탓했지만, 결국 기후변화로 인한 온도 상승으로 대기 중의 수분이 많아지면서 더 강력한 태풍과 폭우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녹지 지역이 적고, 폭우에 대비한 배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도 홍수피해에 한몫을 했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즐길 새도 없이 기상이변으로 인한 가뭄과 홍수, 폭염 등의 기후재난은 매년 더 자주, 더 강력하게 발생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현대인의 삶은 편해진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자연에서의 등가교환은 빠르고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T.S.엘리엇의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더없이 찬란하지만, 탄생과 재생의 고통을 반복해야 하는 ‘가장 잔인한 달’이다. 전례 없는 범세계적 재난에도 생의 수고로움을 이어나가야 하는 현대인의 삶이란 어디 잔인하기만 한가, 그야말로 대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