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참프루
작품의 서사보다 사운드트랙에 더 마음이 꽂힐 때가 있다.
해바라기향이 나는 사무라이를 찾아 떠나는 무겐, 진, 후우 세 사람의 로드무비, <사무라이 참프루>(2004)가 그렇다. 누자베스(Nujabes)의 음악에 이끌려 이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이 작품의 감정선을 이끄는 방식이 이 작품의 독특한 미학이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참프루>는 <카우보이 비밥>(1998)을 제작한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이 선보인 퓨전 힙합 사극이다.
음악 애호가로도 잘 알려진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작품의 사운드트랙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우보이 비밥>의 주제곡인 ‘Tank!’만 떠올려도 그의 음악적 취향과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라이 참프루> 역시 26화 분량에 OST 앨범만 네 장(베스트앨범인 KATANA 제외)을 발표했을 정도로 감독이 얼마나 음악에 진심인 지 알 수 있다.
OST 앨범에 참여한 네 명의 뮤지션 중 주목할 이는 단연 누자베스(Nujabes), 대학생 시절 내 MP3 재생 목록에서 빠지지 않던 이름이다.
일본의 힙합 DJ이자 프로듀서로 애석하게도 2010년, 36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일본 재즈힙합의 선구자로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다.
그는 OST 앨범 가운데 Departure와 Impression에 참여했고, 재즈힙합이 생소한 한국에서 <사무라이 참프루>는 그의 음악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음악은 작품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장면과 캐릭터의 감정, 그리고 서사의 무게를 직접적으로 이끄는 장치다. 몇 개의 곡들을 중심으로 작품 속 장면을 살펴보면, <사무라이 참프루>가 ‘음악이 서사를 쓰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사무라이 참프루>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 해바라기향이 나는 사무라이를 찾으러 나선 후우가 무겐과 진을 만나 동행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간다.
6화에서 에도에 다다른 후우 일행은 한 외국인을 만나 그의 일일 여행 가이드가 된다. 한편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쫓기던 그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일본 총책임자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는 후우가 가진 단도의 장식을 통해 나가사키로 가면 남자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준다.
바로 이때, 몽환적인 분위기의 'Aruarian Dance'가 흐른다.
단순한 리듬과 느린 비트 위에 누자베스 특유의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선율이 반복되고, 잔잔한 베이스가 곡 전체를 안정적으로 지탱한다.
후우가 해바라기 향이 나는 사무라이를 떠올리며 그에게 한 걸음 가까워지는 순간, 음악은 희망과 향수가 뒤섞인 감정에 정교하게 호응한다.
힙합 비트에 재즈곡을 샘플링하는 누자베스답게 이 곡은 브라질 출신의 기타리스트인 로린도 알메이다(Laurindo Almeida)의 ‘The Lamp is Low(1969)'를 샘플링했다. 그의 연주는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Pavane for Dead Princess(1899)’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The Lamp is Low(1939)’를 리메이크한 버전이다.
여러 음악가의 영향이 층위처럼 쌓인 이 계보는 곡 특유의 서정성과 여운을 설명해 준다. 전체 에피소드 중에서 단 두 번밖에 삽입되지 않았지만, <사무라이 참프루> OST 중에서 명곡으로 꼽히는 이유다.
‘Aruarian Dance’가 후우의 여정이었다면, 진의 에피소드에서 음악은 그의 언어가 된다.
스승을 죽였다는 오명을 쓴 채 방랑하던 과묵한 검객, 진.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은 드물지만, 11화에서 남편의 빚 때문에 홍등가로 팔려간 시노와 만나며 처음으로 요동친다.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있던 시노의 마음을 돌린 뒤, 그녀에게 애잔한 감정을 갖게 된 진은 매일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홍등가에서 시노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의 내면이 누자베스의 음악을 통해 드러난다.
진과 시노는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나루터로 향한다. 두 사람을 쫓아온 시노의 남편을 진이 막아서며 그녀를 배에 태워 떠나보내는 시퀀스에 ‘Counting Stars’가 물결친다.
‘Aruarian Dance’보다 감정의 파동이 더 느껴지는 이 곡은 잔잔한 피아노 위로 기타가 얹어지고, 묵직한 드럼이 더해지면서 담담한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감정의 격랑을 느끼게 한다. 별처럼 덧없이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가듯, 음악의 여운은 진과 시노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애틋한 감정의 잔향으로 오래도록 남는다.
‘Counting Stars’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기타리스트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의 ‘Affirmation(1975)’을 원곡으로 한다. <사무라이 참프루>의 OST 앨범이 아닌 누자베스의 ‘2nd Collection’에 수록된 곡이지만, 작품에서의 사용은 정서적으로 완벽하다.
앞서 시노에게 도망치자고 말하는 장면에 삽입된 Tsutchie의 ‘Deeper Than Words’가 진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결심과 긴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말보다는 행동에 담긴 감정을 드러냈다면, ‘Counting Stars’는 진의 절제된 쓸쓸함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무겐의 서사는 류큐 왕국(오키나와)의 주변부적 역사와 깊게 맞닿아 있다.
류큐의 유배지에서 나고 자란 무겐이 동향인 무쿠로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하고, 불타는 배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는 장면에서 ‘오보쿠리에우미’가 서글프게 울려 퍼진다.
물속에서 죽어가는 무겐이 과거를 회상하는 약 5분 동안 배경이 되는 이 곡은, 오키나와 출신의 일본 민요 가수인 이쿠에 아사자키의 노래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별과 수난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의 정서를 담아내며, 무겐의 고단한 삶을 비춘다.
무겐을 중심에 둔 에피소드에 삽입된 누자베스의 곡은 없지만, 16화에서 짧게 사용된 ‘World Without Words’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도망자 신세인 아이누족(홋카이도 선주민) 오쿠루와 무겐이 침묵 속에서 충돌하는 순간, 곡의 긴장감은 두 인물이 국가 폭력에 희생된 주변부의 역사적 상처를 공유하고 있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쉬지 않고 달리는 유려한 비트에 깔린 낮은 베이스 라인과 천천히 고조되는 신시사이저는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첫 결투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동시에 'World Without Words'라는 제목 그대로 말로 할 수 없는 생존자의 고독과 상흔을 음악으로 대신하는 듯하다.
<사무라이 참프루>는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연출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비트에 맞춘 화면 전환이나 카메라 진동으로 표현한 리듬은 힙합 사극임을 전면에 드러낸다. 또한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C'mon yo!'로 시작하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하면, 비트박스가 가미된 내레이션은 내적 댄스를 유발한다.
이 작품에서 힙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는 단연 무겐이다. 그의 거칠고 즉흥적인 검술은 브레이크 댄스를 닮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음악이 장면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무라이 참프루>의 사운드트랙은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내며, 에피소드를 음악적으로 완성한다.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전작 <카우보이 비밥>만큼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사무라이 참프루>가 시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작품이 하나의 ‘음악적 경험’으로 남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말로 '뒤섞다'는 뜻의 '참프루'는 현대의 음악과 시대극을 엮은 이 작품과, 재즈와 힙합을 융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누자베스 그 자체다. 이 혼종의 매력이야말로 진정한 힙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