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 Back
글을 쓰는 일은 내 안의 꺼지지 않는 열망이지만, 동시에 나를 깊이 패는 절망이다.
타자(打字)되지 못하는 문장들은, 잘 쓰고 싶은 욕심과 도저히 써지지 않는 무력감과 함께 뒤엉킨다.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다. 여백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머뭇대더라도, 공백인 채로 둘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나는 브런치의 수많은 ‘나’를 떠올린다. 어디선가 나처럼 기대하고 실망하다 끝내 다시 글을 붙잡을 무명의 창작자들을.
그 모든 나에게, 후지모토 타츠키의 <Look Back>(2024)은 뜨겁고도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후지노는 득의양양했다. 밤새 책상에 파묻혀 그리던 네 컷 만화가 학년신문에 게재되면 친구들의 선망 어린 칭찬이 후지노의 자만심을 끌어올렸다.
만화가가 되라는 친구들의 말에 ‘글쎄~’하며 우쭐대는 오만한 꼬맹이는 자기만큼 만화를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신문에 쿄모토의 네 컷 만화가 나란히 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프로 수준인 쿄모토의 그림에 비하면 후지노의 그림은 어느 모로 보나 ‘평범’ 그 자체였다.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벽 ― 스크린을 뚫고 전해진 후지노의 충격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처음 느껴보는 열패감에 밤낮없이 드로잉 연습을 하는 후지노의 모습은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붙들기 위한 사투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쿄모토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절망은 담담한 포기 선언으로 이어졌다.
'관둘래', 이 한 마디에 담긴 그녀의 좌절은 더없이 차갑고 무겁다.
이런 와중에,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이가 내 오랜 팬이었다고 고백해 온다면 가슴에 불이 타오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문틈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 네 컷 만화 한 장이, 그렇게 두 소녀를 서로에게 데려다 놓았다.
<Look Back>은 <체인소 맨>으로 유명한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만화를 사랑하는 두 소녀의 성장이야기다.
은둔형 외톨이인 쿄모토를 세상으로 끄집어낸 후지노, 후지노가 다시 만화를 그릴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쿄모토. 만화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은 얼굴도 모르던 두 사람을 연결해 주었고, 그리하여 혼자 그림을 그리던 후지노의 작은 방에 쿄모토가 들어온다. 두 사람의 맞은편 창으로는 유년의 계절이 찬란하게 반짝인다.
작품은 서사와 작화에서 원작의 개성을 충실히 재현하면서, 마치 영화를 보는듯한 카메라 무빙으로 두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구현했다.
특히, 쿄모토가 자신을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지노가 빗속에서 춤추듯 힘차게 뛰어가는 장면은 작품의 명장면 중 하나다. 뒤이어 홀딱 젖은 채로 그림에 몰두하는 후지노의 뒷모습으로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영화광으로 잘 알려진 후지모토 타츠키의 감성적인 연출이 돋보인다.
또한 두 인물이 쌓아가는 유대와,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몽타주 기법으로 농밀하게 담아낸 점이 인상적이다. 대사로 채우지 않은 자리에서, 관객은 두 소녀의 여정을 조용히 응시하게 된다.
쿄모토도 내 등을 보고 성장하는구나
<Look Back>에는 유독 후지노의 뒷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후지노가 인물의 선을 그리며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 쿄모토는 그녀의 등 뒤에서 배경을 채운다. 쿄모토는 세상에 발을 디딜 때도, 만화를 그릴 때도 항상 후지노의 뒤에 있다. 하지만, 그 ‘뒤’는 따라가는 자리가 아닌 함께 걸어가는 자리다.
후지노가 처음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질투와 경쟁심을 느끼며 스스로 단련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등을 보며 성장했다.
만화는 하루 종일 그려도 완성되지 않아 그릴 게 못 된다고 후지노는 말하지만, 그녀는 안다.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외롭고 치열했던 시간에 쿄모토가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네가 내 이야기의 첫 독자가 되어주고, 함께 만화를 그려줬기 때문이다.
멈춰있던 후지노의 만화를 다시 시작하게 한 것은 한 명의 독자, 쿄모토다. 만화 한 편에 들이는 수고로움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 작품이 가닿은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우월감에 도취되어 만화를 그리던 후지노는, 쿄모토를 떠올리며 독자와의 ‘연결’을 위해 나아간다.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자신의 작품이 표절당했다고 믿은 괴한이 미술대학에 침입해 흉기를 휘둘렀고, 쿄모토가 희생됐다.
후지노는 과거를 되짚으며 자책한다. 졸업장을 전해주러 간 그날, 네 컷 만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쿄모토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함께 만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Look Back>은 2019년 발생한 교토 애니메이션(이하 쿄애니) 방화사건과 닮아있다. 당시, 쿄애니가 자신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망상에 빠진 범인이 스튜디오에 불을 지르며 수십 명의 창작자들이 삶과 미래를 잃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평행세계를 통해 그날 이후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두 사람이 그린 네 컷 만화가 문틈으로 넘나드는 다른 시간대에서, 서로를 모른 채 여전히 꿈을 좇는 또 다른 후지노와 쿄모토. 이 세계는 남겨진 이들이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작가의 애도이자, ‘꿈은 이어진다’는 낮고 단단한 위로다.
불 꺼진 쿄모토의 방, 후지노가 뒤돌아보자 등에 자신의 사인이 새겨진 쿄모토의 옷이 걸려있다. 쿄모토의 체온이 남아 있을 것만 같은 그 옷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비로소 이해한다. 뒤돌아본다는 건 과거에 머물겠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애도의 과정임을.
그제야 후지노는 죄책감에서 한 발을 떼고, 자신의 길을 향해 다시 걸어갈 용기를 얻는다.
카메라는 이제 하얀 눈밭을 걸어가는 후지노의 등을 쫓는다. 눈을 밟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적요한 세계에는 달만이 둥실 떠있다.
한 때 빗속을 뛰어가던 어린 소녀의 등을 불러내는 이 순간은 또 한 번의 성장을 암시한다.
작업실로 돌아온 후지노는 채워지지 않은 네 컷 종이를 책상 앞에 붙인다. 그리고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뒷모습, 세상의 모든 창작자들을 대변하는 그 ‘등’은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Look Back’은 ‘뒤를 돌아보다’와 함께 ‘등을 보다’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후지노와 쿄모토는 서로의 등을 보며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그 등은 질투와 동경이 혼재하던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자, 성장의 이정표이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험난한 여정에서도 자신을 일으키고 격려해 주던 존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쿄모토는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세상은 등 뒤에 조용히 이어져 있다.
‘등’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게이자, 다시 걸음을 내딛게 하는 가장 깊은 응원이다.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고독한 등에, 존경의 찬사를 보낸다.
And so Sally can wait,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
Her soul slides away,
but don't look back in anger
I heard you say
Don't look back in anger, Oa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