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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거나 죽거나

R.O.D OVA

by 작중화자

책에 미친 여자가 있다.

서점가의 유명한 초특급 VVIP, 2백만 원짜리 책 한 권에도 지갑이 활짝 열리는 그녀만 떴다 하면 서점주인은 돈 세는 일에 행복해진다.

월급을 고스란히 서점에 갖다 바치는 그녀의 집은 이미 안팎으로 책에 점령당했다.


책을 사랑하다 못해 종이로 초능력까지 부리는 이 여자, 날 때부터 ‘독자’인 요미코 리드맨(讀子 Readman)이다.




<R.O.D>(2001)는 라이트노벨과 동시에 제작된 3부작 OVA(Original Video Animation)로, ‘읽거나 죽거나(Read Or Die)’라는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인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다.

고등학생인 내게 ‘밀짚모자 쓴 해적왕’이 아니라 ‘뿔테 안경 낀 독서왕’이 되고 싶은 열의를 심어주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독서광 요미코의 또 다른 이름은 ‘The Paper’.

대외적으로는 기간제 교사이지만, 사실 그녀는 대영도서관 특수공작부에 소속된 비밀요원으로 종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초능력자다.

작품은 백악관 폭격과 미의회도서관에서 벌어진 대규모 희귀 서적 도난 사건으로 막을 연다. 범인은 역사적 인물의 DNA복제로 탄생한 클론. 제각기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재탄생한 위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으키며 희귀본을 수집하고 있었다.

요미코는 뺏긴 책들의 회수 임무를 부여받고 용병 드레이크, 사물을 투과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낸시와 함께 클론들을 쫓는다.


“책을 돌려주세요!”


엉뚱하고 말랑해 보이는 요미코지만 책에 대한 집념이 만들어낸 그녀의 능력은 전투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녀의 손에서 형태를 바꾸는 종이는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 철골을 베어버리는 칼날이 되기도, 총탄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특히, 대형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오토 릴리엔탈(글라이더를 발명한 독일의 기술자)의 클론을 추격하는 모습은 명장면 중의 하나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구현된 공중합동작전은 요미코와 낸시의 특수한 능력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의 서사적 틀을 마련한다.


한편, 2화 후반부에서 잇큐의 등장과 함께 사건의 본질이 드러난다.

역사적 위인들이 찾고 있던 책은 다름 아닌 요미코가 2백만 원을 주고 손에 넣은 『die unsterbliche liebe(불멸의 사랑)』 초판본이었다.

그들은 이 책의 여백에 남겨진 베토벤의 악보를 ‘자살교향곡’으로 재구성해 인류를 말살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낸시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작품의 기발한 설정만큼이나 매력적인 것은 단연 두 히로인, 요미코와 낸시다.

도서관 사서 복장의 요미코와 광택이 도는 전신 슈트를 입은 단발머리 낸시의 이미지는 그들의 특수한 능력을 잘 대변하면서도 개성을 놓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보여주는 ‘워맨스’는 작품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만큼, 감정선과 주요 갈등의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전개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작품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은 하는 것은 세련된 음악이다.

장면마다 적절하게 삽입된 OST는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메인 테마곡은 액션 첩보 영화에 어울리는 박진감 넘치면서도 펑키한 곡으로 오프닝의 감각적인 이미지와 어우러져 장르적 쾌감까지 선사한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신선한 종이 액션, 스파이물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존재감 강한 음악까지, <R.O.D>는 조화로운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 만큼 인물 간 관계나 사건의 배경 설명이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점은 아쉽다.

예컨대 역사적 인물의 부활이라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그 과정이 간단하게 처리됐으며, 요미코 외의 인물들의 서사적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 캐릭터 활용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 속 미국 대통령이 거듭되는 적의 공격에 오줌을 지리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감독이 반미감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합리적 의심과 함께 실소마저 유발한다.




작품은 일련의 음모를 통해 책, 곧 ‘지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보존해야 할 가치로서의 지식과 통제의 수단으로써의 지식. 요미코가 지키는 자라면, 잇큐는 이용하는 자로서 대척점에 서있다.


<R.O.D>는 짧은 분량 안에서 문학의 가치와 정보의 위험성을 다룬다. ‘지식이 누구의 것이며,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단순 재미만을 위한 액션 애니메이션에서 탈피한다.


그러나 이 모든 설정적 대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이 어쩌면 ‘지극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미코가 어두운 서가에서 『die unsterbliche liebe(불멸의 사랑)』을 찾은 순간부터, 작품은 꾸준히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낸시에게 아끼는 책갈피를 선물하고, 현실에서의 사랑이 녹록지 않아도 결국 그 로맨스의 주인공은 항상 ‘너’라고 요미코는 말한다. 그리고 낸시는 끝내 잇큐를 저지하고 그의 옆에 남는 선택을 한다.

두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조건을 떠난 온전한 사랑의 형태인 것이다.


낸시가 ‘순탄치 않은 현실의 사랑과 소설 속 행복한 사랑’ 중에서 전자를 택하며 능동적인 사랑의 주체로 변화했다면, 요미코는 순수하게 책을 사랑하며 그녀의 이름처럼 ‘독자’로 남는다.




<R.O.D>의 시작으로 돌아가 본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일어나 서점으로 향하는 요미코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흥얼거린다. 작품의 말미에서 불길하게 흐를 이 음악, 잇큐의 모략에 이용된 곡이다.

긴 시간을 통과하며 남겨진 유산이 어떻게 다르게 다뤄질 수 있는지, 작품은 처음부터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요미코가 사랑하는 책들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지만, 그녀를 구원하는 것 또한 책이다.

한없이 약해 보이는 종이도 그녀의 손에서는 그 무엇보다 강해진다. 마치 한 줄의 문장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처럼.


요미코의 아늑한 서가를 상상하며, 책장을 넘겨본다.

읽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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