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이 다 되어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콩국수 삶을 건데, 언제쯤 와?"
퇴근길은 언제나 주리고 고프다. 하루 종일 열중해서 일하느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대게는 아내의 문자에서 촉발된 작용들이 퇴근길을 그렇게 만든다.
집에 도착해서 아이들의 "아빠다!"라는 반가운 인사를 들으며 손을 씻고 앉으면, 이내 아내가 마련한 음식이 내 앞에 놓인다.
"잘 먹을게~ 고마워!"라는 인사를 급히 남기고 젓가락을 들어 아내가 싫어하는 쫩쫩소리를 내며 주린 배를 달랜다. 맛을 묻는다면 잔소리다. 아내는 '전' 빼고는 다 잘한다. (건강을 생각해 기름을 아끼는 아내의 '전'은 사실.. 조금 덜 맛있다)
하지만 콩국수가 저녁밥은 아니다. 메인은 또 나온다. 아내는 살뜰히도 토끼와 원숭이와 닭을 먹인다.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이렇게 살찐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아내는 일종의 '사육'의 개념으로 먹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맛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음식을 줄지어 꺼내 놓으니, 활동량이 많은 군인 남편도 살이 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본인은 잘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가족을 위해 하루 삼시 세 때 다 챙기고 네 때 간식을 또 챙긴다. 본인은 늘 반 접시다. 가족을 위해서 아내의 주방이 움직이는 것이 확실하다.
나도 가끔은 그 주방의 장이 되어 늦잠 자는 주말의 아내를 대접하지만, 아내에 비할바가 아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줄게"라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정말 아내의 손에는 물이 마를 날이 없다.
콩국수를 두 그릇 째 먹는데, 불현듯 "너무 당연히도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놓거나 숟가락을 들뿐이지만, 아내가 해내고 있는 주방의 부담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싸가지도 없이 "빨래가 쌓였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던 지난주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고, 어젯밤도 "얼른 애들 재우고 같이 놀자"며 애들보다 먼저 녹다운되어 잠들어 버린 아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코로나가 아이들을 집에 구류했고, 아내는 하루 종일 아이들과 나를 먹이려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고 있었다. 주방은 아내의 세계였다.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퇴근하고 문을 열며 맡을 수 있는 집밥의 냄새들은 내겐 그저 기분 좋은 일상이었고, 나는 다른 무얼 할 겨를도 없이 젓가락을 들었었지만, 그 기분 좋은 냄새는 아내에게 하나의 무거운 굴레가 되어있었다.
집밥은 아내에게 굴레다. 아내는 그 굴레를 둘러메고 오늘도 아침부터 삐약거리는 아이들 입에 열심히도 깨끗하고 영양가 있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넣어주고 있다.
집밥의 굴레를 벗어던지는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어 가정부를 쓴다고 될 일인지, 가사 분담률을 조정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는 당장 가정부를 들일만큼의 돈을 더 벌기 쉽지 않을뿐더러, 나 역시 이미도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오면 나름 육아 가사에 집중하고 있으니, 나도 매일 '휘청' 할 지경이다.
나도 굴레가 있다고 생각하니 '해결책'을 꺼내기 어려웠다. 먹는 문제는 평생이고, 언젠가는 우리의 굴레를 벗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당장에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단순하게 생각해야지 어쩌겠는가.
'너무 당연히도 먹고 있었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감사하다고, 맛있다고 더 잘 표현하며 먹는 게 상책이 아닐는지' 고민해보았다. 사실 내가 누리는 집밥의 행복이 모두에게 당연하지는 않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어깨를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이왕 맛있게 먹는데 맛있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먹으면 아내가 기쁘지 않을까.
어른이라는 것이 되어 하나씩 하나씩 더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다면,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면 말이다.
콩국수가 맛있어 연달아 세 그릇을 먹으며 별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콩 국물 참 고소하다.
"여보 너무 맛있어! 한 그릇 더 줘!"
(허겁지겁 먹다 보니 콩국수 사진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