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가지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그대로였다. 한 가지 웃긴 점은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큰 훈련들을 하고 휴직을 다녀오고, 복귀하자마자 또 큰 훈련을 하는 것으로 계획했는데, 결과적으로 정 반대로 되어버렸다.
훈련 일정은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계속 바뀌었고, 결국 내가 휴직을 하자마자 큰 훈련들이 시작되었고, 내가 복귀하기 전에 그런 훈련들은 모두 끝나버렸다. 아쉽게도.
석 달 동안 큰 훈련과 사사로운 사건사고들을 있었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면 내가 있다고 안 생길 것들은 아니었다. 반대로 없다고 생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부담감은 없었다.
물론 일부 선배 전우들은 나의 휴직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내가 그들의 시선을 무서워해서 소신을 굽힐 일은 아니었다. 나에겐 아무런 불이익이나 피해가 없었다. 바뀐 것도 전혀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나를 따라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작된 변화
먼저는 우리 부대와 인접부대의 선후배들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싶다며 나에게 문의 전화를 주기 시작했고, 실제로 서너 달 뒤에는 휴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규정상 휴직 시작 90일 전 신청이 원칙이다)
그리고 소문을 전화와 카톡을 타고 전선을 넘어 옆 사단으로, 옆 군단으로 옮겨졌고 경기도 일산에서 강원도까지,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확산되었다.
나도 육아휴직을 고민할 때 먼저 경험했던 선배나 동기가 없어서 물어볼 수 없었는데, 이제는 내가 첫걸음을 떼었고, 때문에 정말 많은 동기들이 전화를 해왔다.
마침 그때의 시기는 동기들이 너도나도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던 시기였다. 한 6년 앞만 보고 달려왔던 동기들에게 처자식이 생겼고, 휴직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파도는 시작되었다.
몇 달 뒤, 전국 각지에 동기들이 휴직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머리는 길어서 염색이나 파마를 하고 아이들을 안고 있는 동기들의 사진이 올라왔다.
패러다임 스위프트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육아휴직이 전혀 이상하거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과시간을 조정해서 근무하는 탄력근무제나, 2시간 단축해서 근무하는 '자녀 돌 봄시 간'도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심지어 진급이 들어가는 올해 전반기에, 평정(인사고과)을 받고, 진급추천을 받고, 지휘추천을 받는 모든 시기에 '자녀 돌봄'시간을 사용해서 15시에 퇴근했다. 코로나로 하루 종일 아이들을 보고 있는 아내를 위해 부대에서 눈치를 받거나 진급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장교들의, 특히 진급대상 장교의 자녀 돌봄 시간이 전무했었다. 오히려 육아휴직했을 당시보다 올해 전반기에 자녀돌봄시간을 써서 일찍 퇴근했던 기간에 '미친놈'소리를 더 많이 들었다.
남들은 진급을 위해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 보이고 야근하고 주말에 출근하고 경쟁하는데, 나는 남들보다 오히려 두 시간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한참을 놀다 지쳐서 집에 들어갈 즈음 군 관사에 다른 동료들은 퇴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단축된 시간속에서 업무를 마치려고 더 치열한 일과시간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나의 진급은 또 한 번 군대 내에서 아빠들의 육아와 가사분담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생각한다. 확실하다. 분명 많이 회자가 되고 있을 것이다.
"야, 걔 육아 휴직하고 자녀 돌봄 시간 썼는데 진급됐잖아"
민구 이후의 세상
변화는 시작되었고, 각도는 나왔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혹은 더 최적화된 각도를 찾아 가정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시에 전장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있으려면, 최소한 평시에는 가족에게 최대한으로 쏟아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 역사 속에 장수들처럼, 군인으로서의 삶만 강조하고 전쟁이 나면 가족과 식솔들의 목을 치고 전장으로 나가는 모습은 교훈이 아닌 이상함을 선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군에도 뉴 노멀이 정착된 것이다.
어떤 선배들은 "요즘 군대 개판이다, 군기가 없다" 이야기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화살이 있던 시대에는 활로 싸우고, 총이 나오면 총으로 싸운다.
새로운 문화를 가진 새로운 젊은이들이 입대하면 그들의 장점을 살려 전투를치러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바뀐 룰을 빨리 캐치해야 하고, 더 좋은 룰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