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을 목적으로 썼다기보다는 내 특이점을 뽑아내기 위해서 쓴 글들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진짜 독자 입장에서는 남의 잘난 척이 그다지 재미없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스터 또각 펄럭] 편은 '내 단점'에 초점을 두고 쓴 글이었는데, 한 편 만으로는 잘난 척해놓은 글들을 상쇄하기 모자란 것 같아 단점에 초점을 맞춘 글을 더 써보기로 한다. 그 후속, '미스터 직진남'이다.
계획을 좀 가지고 살자
아내는 늘상 말한다. 계획을 좀 가지자고.
사실, 저녁마다 마주 않았을 때 아내가 매일 하는 소리는 "그래서 우리 어떻게 하지?"이고, 나의 대답은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이다.
심지어는 특정한 주제도 없이 아내는 '저 질문'을 습관처럼 반복한다. 분명 본인도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그래도 자녀들이 생기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휘돌아 감는가 보다.
우리 둘이 잘 맞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정은 늘 안개 낀 바다를 항해하는 뗏목(배도 아니다)같이 표류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장 내일, 다음 달,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놀이동산을 가든, 여행을 가든 계획은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짐을 좀 챙겨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까지도 계획이 없을 때가 부지기수다.
도로에서 기름을 낭비하는 동안, 아내의 검색과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서 행선지가 결정되고 만나는 수많은 우연성에 가슴 졸인다. 불안해서 졸이는 가슴은 아니고 ㅎ 그렇게 해서 막상 도착하니 식당이든 관광지든 '닫은'경우가 많았어서 그렇다.
총성이 울리는 순간,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기본적인 마인드 셋이 그렇다.
아무리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더라도 모든 변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계획이 구체화되고 세분화될수록 내가 '틀릴 확률'은 높아질 뿐이다.
[결정장애 테라피]라는 매거진에서도 관련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무계획이 상팔자'라는 말이 정말 맞다. 계획할수록 번뇌가 많아지는 굴레를 짊어지게 된다.
사전에 아무리 걱정을 하고 계획을 하더라도, 실제 상황이 시작되고 나면 모든 것들은 바뀌어버린다. 우리의 진행을 방해하는 '마찰'의 요소들은 항상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가 힘을 쓸수록 마찰력은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목적지만 정하고 방법과 수단을 계획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잠재력과 지식의 저변을 넓혀 놓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획이 없다. 실제로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잠재력과 방대한 지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난 한참 멀었다.
고민이불편하니, 직진
직진을 선호한다. 그래서 실패도 실수도 무척이나 많은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식당에 갈지 고민하기 싫어 보이는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가 낭패를 보기도 부지기수다.
선택의 옵션이 많이 주어지는 상황을 왜 그리도 못견뎌 하는지, 마치 사춘기의 남자가 맘에 드는 이성을 만나 부끄러워몸둘바를 몰라하는 것 처럼 말이다.
한 번은 행군을 하는데, 제일 앞에 서서 가고 있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아무래도 좀 헷갈리는데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멀뚱히 멈춰 서서 지도를 보고 있기에도 좀 무능해 보일 것 같았다.
"아, 여기 아닌데"
잠깐 코너를 돌아 좁은 계곡길을 지나다 보니 직감적으로 '잘못 들어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몇 미터 더 걸어 들어가니 길이 끊겼다. 뒤에는 이미 좁은 길을 따라 부하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돌아 나가기는 무척 곤란해 보였다.
"아, 몰라. 직진"
길이 없었지만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앞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나무나 풀이야 부수면서 가면 되는데, 눈도 쌓여있고 경사도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백 명 넘게 걸어가는데, 길이 만들어지지 않겠어?ㅎ"
하지만 생각보다 경사는 급했고, 급기야 사륜구동(두 손-두 발)으로 오르기가 시작되었다. 고 짧은 100여 미터 나아가는데 한 참이 걸렸던 것 같다. 제일 앞에서 숨을 헉헉거리며 가까스로 다 올라와서 중대원들을 기다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부하들은 더 가뿐 숨을 몰아쉬었고, 대형은 길게 신장되었다. 직진하지 않고 조금만 돌아서 갔다면 더 쉽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직진만 고집하던 아집이 부하들의 체력을 방전시켰다.
직진의 끝판.인도차이나반도 종단 여행
직진의 최고(최악) 봉은 육아휴직 간에 이뤄졌다.
애초에 치앙마이에서 100일도 안된 둘째 아이를 데리고 한 달 살기를 하러 갈 계획(무계획)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공기가 너무 안 좋고 지루했다.
우리는 한 달 살기를 준비했기 때문에 배낭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둘째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쟁이 었지만, 계획 없이 남진하기 시작했다. 비행기, 기차, 버스, 택시, 배를 포함해서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해 40도를 오르내리는 태국을 종단하기 시작했다.
매 순간 계획은 없었고, 예약된 숙소도 교통수단도 없이 끊임없이 남쪽으로 직진했다. 그렇게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시작된 직진은 2500여 km를 거쳐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까지 이어졌다. 인도차이나반도를 종단한 것이다.
40도 넘는 기온에, 열대성 스콜이 항상 따라다녔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각각 아이를 하나씩 들고, 케리어를 하나씩 끌고, 유모차와 기저귀를 챙겨서 늘 절대적인 피로에 시달렸다.
당장 버스/기차로 이동 중이면서, 다음 숙소가 없어 검색하기 바빴고 변수는 어디에나 넘쳐났다. 사실 한 달 살기에 필요한 예산은 얼마 들지 않을 수 있었으나, 그 변수들에 일일이 대처하고 숙소와 비행기를 계속 변경하면서 생긴 [멍청비용]은 우리의 태국 한 달 살기 비용을 유럽여행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다녀와서 그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생도 때부터 10년을 부었던 주택청약마저 해약했다.
그 여행에서 '직진'은 틀렸었던것 같다.
그래도 직진인생 최고의 성과, 아내!
거리를 재거나 조건을 따지거나 밀거나 당기거나 한 적이 전혀 없다. 그저 만나서 좋았고, 1주일 뒤 사귀자 했고, 다시 1주일 뒤 결혼하자고 했다.
아내에게도 살면서 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이 매력으로 어필이 되었는지, 우리는 5개월 만에 결혼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곡선은 없었다.
직진남을 저지할 수 있는 방어수단이 없었다.
과연 득인가 실인가
물론 직진적인 성격과 언행으로 속은 시원하게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손해가 더 많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역시나 성격상 정확히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따져봐도 그렇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기에' 나를 고칠 생각은 없으나 조금 다듬기는 필요한 것 같다. 좀 더 세련되고 부드런 말투와 행동이 '매너'라고 불리는 조건들인데, 이제는 신사다운 모습을 보일 나이가 된 것 같다.
야구선수가 직구만 던져서는 절대 경기를 승리로 이끌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커브도, 체인지업도, 각종 변화구도 던지며 삶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