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츄리닝을 사는 이유

Men In Uniform

by 아빠 민구


"군인만 츄리닝 입고 다니지 다른 사람들은 다 캐주얼이라도 입고 다녀"


지난주, 첫째 아이 유치원 오티에 참석하려는 내가 옷장에서 주섬주섬 츄리닝을 꺼내자 아내가 한 마디 했다. 나도 그 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게 중에 단정한 츄리닝을 꺼내 손에 들고 조심스럽게 물어봤었는데- 역시나 '반려'당했다.


그러고 보니 내 옷장에는 대부분이 츄리닝이었다. 반팔이며 긴팔이며 저지며 바람막이며 하는 어두운 색 계열의 것들이 사이즈 별로 들어가 있었다.


사이즈는 95, 100, 105였다.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무게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면서 다양한 사이즈를 사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95 사이즈를 입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언젠가 다시 있을 날씬해질 날을 고대하며 95 사이즈 옷들은 옷장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사시사철 어디든 기능성 좋고 편하고 튼튼한 츄리닝이 너무 좋다.


아내에게 츄리닝만 입는다고 핀잔을 들었지만, 지난 일요일 또 츄리닝을 샀다. 따듯한 봄이 되었는데 적당한 바지도 없고- 요즘 골프/테니스를 하는데 입을 반팔티도 없었다. 없었다는 게 웃기지만 정말 없었다.


물론 멀끔히 차려입고 출퇴근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지만 내가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나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사복 패션은 츄리닝으로 시작해 츄리닝으로 점철되었다가 츄리닝으로 종결되었다.




우리 군인들은 왜 이렇게 츄리닝을 사는가- 왜 츄리닝을 그렇게 선호하는가-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피크닉 때도 친구 모임에도 아무튼 언제나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가-


이건 마치 사원이 슈트를 입는 것, 엔지니어가 작업복을 입는 것, 의사가 흰색 가운을, 판사가 법복을 입는 것과 같다. 직업의 업무환경과 특성을 고려한 일종의 유니폼과 같은 개념이다.


사람들은 군인이 전투복만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체육복을 입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군 생활 최고의 복지인 일과시간 내 운동을 하는 '전투체육'에서부터 시작해, 출퇴근과 야근까지 츄리닝이 함께한다.


비단 옷 뿐만 아니다. 뭐 그렇게 신발을 사냐고 하는데- 러닝화도 있어야 하고(최소 두세 켤레) 축구화 풋살화 테니스화 등산화 골프화 족구화도 있어야 한다.


것은 이미 직업적으로 한참 군생활을 이어온 사람들의 업무환경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돌이켜보니 부대에 임관해서 새로 전입 오는 소위나 하사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위아래 세트로 된 잘빠진 츄리닝을 새로 장만해서 전입을 오곤 한다.


아무래도 '군인은 체육복이지~!'라는 생각인지, 직업으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단계(임관)에서부터 츄리닝을 세팅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지망생들에서부터 이미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부대에서 멋지고 깔끔하고 트렌디하거나, 혹은 클래식하지만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츄리닝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왠지 능력 있고 패션센스도 있고 뭐든지 잘할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긴다.


모두 다 츄리닝만 입고 다니는데- 게 중에서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하고 팬시 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하고는 제 아무리 츄리닝이라고 할지언정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종종 소비성향이 강한 젊은 군인들 사이에서 츄리닝의 군비경쟁처럼 번지기도 한다.



항상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들과 함께 군 생활하는 30대, 40대, 50대의 직업군인들은 츄리닝을 '최신'으로 입지 않을 경우 무척 나이 들어 보일 수 있기 때문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아저씨'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아저씨가 맞지만..)


또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항상 유사시를 위해 수련하고 또 단련(training)하는 우리 군인들에게- 직업적 전문능력 계발을 위한 '트레이닝'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런 트레이니(trainee)와 트레이너(trainer)들에게 츄리닝(training suit)은 마음가짐과 업무태도의 발현이 아닐까. 어쩌면 좋은 체육복을 땀내나지 않게 성실히 빨아 입고 다니는 게 업무의 시작과 끝은 아닐까.


그렇다. 츄리닝은 군인들에게 필수품, 기본품이자 유니폼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군인들이 계속해서 츄리닝을 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저녁, 하루를 마무리 하는 시간에 내일 아침 입을 츄리닝을 꺼내놓고 잠이 든다. 아침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30초면 입을 수 있고 , 따듯하면서도 통풍과 땀 배출이 잘되고, 깔끔한 츄리닝.

오늘도 우리들은 츄리닝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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