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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Oct 07. 2021

돌아갈 수 있다면

결혼기념일



네 아이를 돌보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크리스마스도 지나버렸다. 아-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라며 아쉬워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내일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차라리 생일이라면 그냥 담담하게 넘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올해의 결혼기념일을 보내버리면 한 해가 너무 서운 것 같았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낸 일 년이었다. 12월 27일, 이번 결혼기념일만은 무리해서라도 챙기기로 했다.


나는 백방으로 주변에 근사한 레스토랑을 수소문했으나 연말, 그것도 하루 전에 예약이 가능한 곳은 없었다. 더군다나 여섯 식구가 앉을자리도- 그런 우리를 반기는 식당도- 찾기 어려웠다.


 군데에 '예약 대기'만 걸어놓고 아내에게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하러 방으로 가 보니, 아내는 쌍둥이들을 안고 쓰러져 잠이 들어 있었다.


난장판이 된 식탁이며 장난감이며, 다 된 빨래며 정리를 하고 아내 옆에 누우니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밤 새 두어 차례씩 깬 아이들의 뒤치닥 거리를 하고 나니 어느덧 피곤한 해가 떠올랐다.


하루가 시작되었다. 할 일은 분주하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과일을 깎고 시리얼을 말았다. 이를 닦이고 세수를 시다, 늘은 우리의 일곱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아내에게 레스토랑을 예약하지 못했다는 말을 조심히 전했다. 아내는 한 숨을, 참고 알았다 대답하고는 앙앙 우는 넷째에게 젖병을 물렸다.




레스토랑에서 전화가 왔다. 예약 건이 취소되어 자리가 났다고 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정신없이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오면 아이들이 모두 잠들 것 같아서 네 아이를 목욕시키고 기저귀며 젖병이며 분유며 비상용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차에 실었다. 가 지고 있었다.


아내는 화장품을 챙겨 달리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화장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아내의 두 볼이 발그레했다. 들뜬 연말의 거리들을 지나 식당에 도착했다. 아내와 나는 각자 한 명씩의 아이를 안고 또 한 손에 아이 하나씩을 데리고 식당 입구에 섰다.


어두운 밤, 레스토랑에서는 주황 불빛과 좋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리는 이게 얼마만이냐며 호들갑을 떨고 눈빛을 맞췄다. 아내의 한껏 부푼 마음은 미소로 번져 나왔다. 우리 여섯은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여기 정말 입소문 날만했다. 레스토랑 분위기 정말 근사하다며 감탄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안 보인다? 아내도 연애시절 즐겨 입던 허리 잘록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내 뱃살도 보이지 않다. 허리춤을 더듬어 봤으나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거기에 없었다.  


순식간에. 레스토랑 문을 통과하는 그 순식간에- 우리는 7년 전 언제가로 돌아가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아내와 두리번거리는데 매니저가 우리를 창가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 촛불이 뭔가 안다는 냥 흔들거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특별히 문제 될 것도 없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름다운 밤이라서 그런가- 하며 뭔가에 홀린 듯 음식을 주문했다. 아이 넷 임신부터 모유수유까지 장장 7년 간 입에 술을 안 대던 아내와 옛 추억을 떠올리며 '뱅쇼'를 마셨다. 따듯한 기운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 뱃속 어딘가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향긋한 허브 향이 코를 자극했고, 고기는 충분히 부드럽고 달콤했다. 아내와 그보다 더 달콤한 눈빛을 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입을 가리고 웃는 아내의 모습이, 그 모습이 정말 7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챠이코프스키의 음악과 함께 꿈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매니저는 디저트로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가능하다고 했다. 뭐라도 상관없었지만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매니저는 고민하는 우리 부부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커피를 드시면 현실로 돌아가시고, 아이스크림을 드시면 지금에 남습니다."


"아-"


아내와 나는 눈을 맞추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에 내 마음속에서는 당황스러운 아쉬움이 스며났다. 나에겐 아내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아이스크림을 고르자고 했다. 머리 끝이 갈라지고, 피부가 푸석해지는 아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고생하는 아내의 삶으로 돌아가지 말고 우리, '지금'에 남자고 했다.


아이들이 소중하지만, 나에겐 아내가 가장 소중한 존재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여기에 좀 더 머물면서 아내와 함께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곤 나에게 조용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내는 커피를 주문했다.




계산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나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차 안에는 네 아이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도 오랜만에 편하게 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십 번도 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운전을 하다 보니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잠든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서 집으로 옮겼다. 침대에 누이고 을 정리했다. 목욕을 하고 나오니 모두가 곤히 자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아마 결혼하고 가장 기억에 남고 행복하고 피곤한 기념일이었던 것 같다.


대충 정리하고 아이들이 잘 자는지 살폈다. 시곗바늘 두 개가 포개졌다. 아내 옆에 누워 아내 손에 내 손을 포갰다.  아이들은 밤새 깨지 않았다. 우리 여섯 식구 모두가 올해 가장 달콤한 잠을 선물 받은 밤이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아내는 매일 밤 선잠을 자며 악몽을 자주 꾸는데, 얼마 전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꿨다면서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식당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없어졌고, 우리 둘은 젊어져 있었다고요.


그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봤습니다. 글을 쓰려 아내의 젊은 날을 떠올리고 따듯한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한 줄 한 줄 옮기는데 저도 미소가 절로 나오네요.


젊은 날도 좋았지만, 지금도 좋고. 그렇게 생각하니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행복한 삶을 살 거야- 라는 행복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이전에도 행복했었고 어제도, 오늘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하니 행복 지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피곤하고 무거운 매일이 이어지고 있지만, 나름 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덕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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