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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Aug 04. 2022

아메리카노 리더십

시대적 흐름이 되지 않을까


일반화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술자리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술자리에서는 많은 정보들이 오가고, 속마음을 터놓고 감정을 나누고, 생각보다 많은 업무지시사항이 하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술을 끊은 지 반년이 된 것은 물론이고 아빠가 된 이후로는 거의 대부분의 회식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일 년에 두세 번이나 갈까. 회식을 하는 몇 시간 동안 아이들을 혼자 돌보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 회식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하고 미안하다.


상관이나 선배들이 사주는 술도 안 마시고, 나의 부하들에게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으니 앞서 말한 술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 혓바늘 같은 불편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자리에서 공유됐던 많은 것들에서 배제가 되어있다 보니 동료들에 비해 한 박자 느리게 알게 되고, 그만큼 늦게 준비하고 늦게 시작된다. 업무에서의 추진력을 가지기 쉽지 않다.


분명히. 내가 없는 그 자리에서 소주잔을 높이 들고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을 텐데, 나는 그들의 리더십 영향력에서 배제되어있고 내 부하들에게도 그런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감정과 친밀감에 큰 부분 의지하는 '리더십'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무주택자 수준으로 빈약하고 불안한 상황이다.




하지만 나 역시 리더로서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 과정에서 리더십 없이 임무를 수행하 것은 불가능하다. 나무의 가지가 잘리면 옆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오듯 소주 리더십을 우회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아메리카노 리더십]이다.


사실, 이전에는 커피를 사 먹는다는 것이 꽤 큰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나 한잔 마시는 정도야 몇 천 원이지만 부하들 네댓 명만 커피를 사주더라도 2-3만 원이고, 열 명이면 목돈이 들기 때문이다. 부담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소주도 한 병에 오천 원씩 하는 마당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과연 비싼 돈일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소주 한 병 마시면서 주고받는 에너지만큼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오히려 한 잔만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훨씬 더 싼 편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안 마시사람은 있어도, 아메리카노를 안 마시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잘만 활용한다면 소주보다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닿으니 커피에 돈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카페에 데려가서 간단히 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프티콘으로 보내거나 사서 사무실로 가져다주거나 하는 일도 잦아졌다.


밥을 사주고 나서 커피를 사려고 하면 보통은 밥을 얻어먹은 쪽이 커피를 사겠다고 달려들지만, 거절이다. 밥 먹으면서 술을 안 사줬으니 그 대신 커피까지 내가 사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느낀 점은, 생각보다 커피를 사주면서 대화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하호호 떠드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정신을 맑게 해 주고 더위를 식혀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는 것은 또 다른 강력함이 있었다.


취중진담과 다르게, 내가 가진 생각을 또렷하게 전달하거나 같이 휴식을 취하는 느낌으로 커피를 마시는 일은 업무의 긴장감속에서 나누지 못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아주 멋진 방법이었다.


술자리에서 보내는 많은 시간과 돈, 숙취로 인한 부담감들이 커피잔 속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간, 돈, 숙취라는 장애물이 없다 보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도 더 다양해졌다. 이제는 15년 정도 차이가 나는 초임하사나 병사들부터 군생활 지긋하신 분들까지 커피 공급망에서 배제된 사람은 없었다.


특히 개인의 시간과 사생활을 중시하는 MZ세대와는 소주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저녁시간을 통째로 요구하고 다음 날 숙취까지 있는 거국적 한 잔보다 부담 없이 한 잔, 그게 그들이 원하는 정도의 소통의 전용면적이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아메리카노 리더십은 폼 동영상이나 공유경제 같은 시대적 흐름이다. 시대의 트렌드에 잘 들어맞고 적용대상도 폭넓다. 모든 면에서 장점만 있는 궁극의 리더십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적용하기 좋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소주 리더십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같이 울고 같이 즐거울 때는 또 그것만큼 효과적인 리더십도 없다. 하지만. 나와 내 상황에 맞고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적용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는 느낌이다.


이 전까지 회식 날만 되면 괜히 빠지는 것도 미안하고, 회식 이후에 뭔가 소외되는 것 같은 느낌이 참 불편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도 리더십은 있으니까.


"벤티 한 잔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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