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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Aug 11. 2022

고요의 바다

아이들 소리에 귀를 막다


아마도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



적당히 60km 정도 행군을 한 뒤 지치고 땀내 나는 몸을 이끌고 돌아와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놓는다. 치킨을 주문해놓고 적당히만 시원한 물로 천천히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대충만 닦고 선풍기 앞에 앉아 치킨과 함께 코뼈를 때리는 시원한 500ml 맥주를 세 캔 정도 마시고 치킨을 세 조각 정도 남긴다. 과학 유튜브를 틀어서 보다 졸면서 얼굴에 핸드폰을 두 번 정도 떨어트리고는 목이 굉장히 편한 베개와 몸이 쑥 꺼지는 메모리폼 매트에 누워 잠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빗소리가 츠츠츠츠- 하면서 들린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끝나지 않고 36시간 정도 지속된다. 방해 없이 34시간 정도 자다가 2시간 정도 뒹굴거리는 가운데 복권에 당첨됐다는 문자에 놀라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대충 이 정도 상황이 되면 5년 치 묵은 피로와 스트레스가 좀 풀리지 않냐는 말이다.  



어제는 퇴근해서 저녁을 먹이고 있는데 첫째가 서운 표정으로 말한다.  


"동생들은 좋겠다. 아빠가 밥도 먹여주고"  


한 번이면 모르겠는데, 몇 번을 반복하는 녀석의 말이 귀찮거나 밉지는 않았다.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어리광 부리며 밥을 먹여달라는 녀석의 장난에 정말로 밥을 먹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첫째와 셋째의 밥을 떠먹였다. 기차소리를 내는 숟가락, 비행기가 되어 날아가는 숟가락, 개처럼 멍멍 짖는 숟가락을 시현해가며 아이들 입속으로 양분을 밀어 넣었다.  


넷째는 엄마가 먹이고 있었고, 둘째만 스스로 밥을 먹는 상황이 되자 둘째가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장난과 짜증과 불만 같은 것들이 회반죽처럼 섞여 나의 뒷덜미를 잡아채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쉼 없이 말하는지. 어우. 듣고 있기가 거북해지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소리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모든 소리가 소음이 되었다. 에어컨과 선풍기 소리, 아이들 장난감 소리, 창문 밖에서 주차하는 소리 등 소머즈가 된 것 같았다. 개들은 청력과 후각이 인간에 비해 수십 배 좋다는데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다 먹이고 언제나처럼 급하게 쏟아 넣으려고 떠온 밥 한 공기가 들어가지지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귀를 막은 두 팔의 팔꿈치가 식탁에 닿아있으니 진동을 통해서 들리는 소리들이 여전히 나의 청력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쉬고 싶었다. 당장에 소파에 가서 몸을 던져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거 말고 파도소리도 없는 무인도에 가서 고사목처럼 조용히 가만히 있고 싶었다.


나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아내가 아이들을 자제시켰으나 조용히 하란다고 조용히 할 것 같았으면 아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며 먹고 떠들고 장난치고 울었다.  


아내에게 잠깐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서 그냥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잠깐이어도 좋았다.  



나는 유독 시끄러운 소리. 아니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 말고 정돈되지 않고 정신없는 소리에 취약하다. 차라리 천지가 찢어지는 포병사격을 듣고 있으라면 듣겠는데, 왕성 왕성하는 소리는 견딜 수가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뒤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가 화로 표출되거나 급성 번아웃을 유발하기도 한다. 아마 정신에 문제가 좀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보다 아내가 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내고 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아이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버티고 있는 아내를 보며, "와 정말 멘털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한다.  


 


내 귀에도 음소거 모드가 내장되어있으면 좋겠다. 라섹수술하듯 이비인후과에 가서 소리나 냄새, 미각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설정 옵션을 수술받을 수 있는 날도 오긴 하겠지? on/off 전환만 확실하다면이야.  


아무튼 지금은 좁은 집에서 여섯 명이 복닥 복닥 하면서 살다 보니 이번처럼 이렇게 청력 탈진 현상도 겪어보고 참-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한 번은.  




한 번은 짙은 푸른색의 바다 위로 긴 노를 저어서 고요의 바다를 횡단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휴가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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