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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Aug 16. 2022

그래, 반지하는 살아보고 하는 소리야

반지하를 없애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인가.


볕도 안 드는 반지하에 뉴스 카메라가 들다니.


원래도 집에만 들어오면 온 집안에 불을 켠다. 을 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반지하에서의 경험이 습관이 된 것인지, 그때의 감정까지 남아 어두운 집안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인지.


근래는 계속해서 비가 온다고 날씨가 궂었다. 역시나 어둑어둑한 분위기가 싫었던 나는 구석구석 불을 켜놓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안 좋은 사고도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야기를 듣자 반지하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들이 급류처럼 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급류처럼 /  출처 : 중앙일보


반지하.


뉴스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반지하를 없애겠다고 하는 말을 전했다. 반지하에 살던 사람을 지상층으로 이사시켜주는 것은 아닐 터. 지키기 쉽지 않은 약속 같아 보였다. 잘은 모르겠다. 반지하가 왜 있는지. 그냥 1층부터 집을 지으면 될 것을. 왜 애초에 반쪽짜리 창문만큼만 햇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든 일까.


근거가 있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남북 대치상황에서 도시의 요새화를 위한 준비로 반지하 개념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반지하가 거점마다 있는 벙커나 방공호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지공사를 위해 거점에 나가보면 벙커마다 그렇게 습하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지. 자리 잘 잡은 벙커는 꼽등이가 벽 전체를 덮어 검은 벽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천수만의 더듬이가 움직이는 벽지.

 

그만큼 반지하는 사람보다는 꼽등이 같은 벌레에게 어울리는 공간이다. 나는 그런 공간에 세 번을 살아봤다. 반지하에 살면서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린 시절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기억들을 선택적으로 삭제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기억력이 별로인 걸까. 나마 뉴스 덕분에 남아있는 기억을 잘근잘근 되짚어보게 된다. 그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아 25년 전쯤 살던 동네의 로드뷰를 따라가며 살펴보았으나 두 곳은 없어졌고, 남아있는 한 곳 역시 애초에 로드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집은 아니었다. 지하에 있는 집이 길에서 보일 리가.


간신히 건진 기억들을 조각보처럼 어 본다.




#01 내가 처음으로 살아본 반지하 : 학교 앞 20m 반지하


초등학교 3~4학년쯤 됐었을까.


이 집은 사실 반지하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 게, 아예 지하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하 이면서도 출입구를 열고 나가면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현관을 나서 뱅 둘러 계단을 올라가면 1층에는 문방구가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 바로 앞 문방구. 수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이 드나들던 그.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옆 아파트를 찾는 것과 같이, 당시에는 부모님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나의 등교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셨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학교 바로 앞 지하실에 산다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문방구 앞에 놓여있는 뽑기의 플라스틱 캡슐 쓰레기가 항상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널브러져 있었다. 뽑고 던져버리기 좋은 쓰레기통 같은 위치-라고 하기엔 좀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집이 대략 그런 위치였다.


출처 : 추억백화점

토끼굴 같은 집이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현관을 들어서면 부엌 겸 욕실 겸 사용했던 공간이 있었다. 작은 창문이 있는 방 두 개가 일자로 쭉 이어진 그런 집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 현관을 들어서면 어떤 관경이 펼쳐졌었는지 말이다.


그 당시의 기억은 두 가지가 남아있다.


하나는 그 얄미운 뽑기 플라스틱 쓰레기가 그렇게 싫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뽑기 안에 있는 장난감이 어찌나 가지고 싶었던지. 한 번은 누군가에 의해서 뽑기 기계가 파손돼 있었는데 어둑한 저녁시간에 그 터진 기계 옆구리에 손을 넣어 장난감을 훔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부끄럽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때 당시 문방구 바로 옆에 사는 내가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집과 비슷한 그런 집들이 담벼락과 옹벽으로 바둑판처럼 서로의 공간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담과 벽들을 넘어 다니거나 가로지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떨어졌으면 크게 다쳐서 지금 없거나 바보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찔함이 어쩌면 나에게 주는 쾌감이 되었고 하나의 탈출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출처 : 영화 '기생충'


#02 내가 두 번째로 살아본 반지하 : 리얼 반지하

 

도로 바로 옆에 있는 반지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를 볼 수 있는 총안구 같은 반창이 달려있었다. 첫 번째 반지하 집 다음에 아마 여기로 이사를 왔던 것 같다. 역시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으니 이 집과 저 집 사이의 시간은 대략 1~2년. 그러니까 대충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에 이곳에 살았던 것 같다.


이 집은 반창이 도로 쪽으로 나있지만, 건물 반대편에 있는 출구로(현관보다는 출구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다) 나오면 그래도 뷰가 괜찮았다. 한 5m 되는 옹벽 아래로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시간만 나면 논으로 밭으로 개구리며 잠자리며 잡으러 다녔던 좋은 기억이 있다. 비 온 뒤면 언제나 집 앞 길가에 버려지는 우산을 주어다 낙하산을 만들어 옹벽 아래로 던지며 놀았던 기억도 있다. 해 질 녘 논밭을 바라보며 앉아 창세기를 읽어대던 기억도 난다. 한 번은 아빠가 직접 갈비찜을 해주셨던 기억도 난다. 분명 좋은 일이 있었던 날 같다.

 

"그래도 이 집은 좋은 추억이 많네"라고 생각하려는데, "아니구나" 하고 먹구름 같은 기억들이 몰려왔다.


취객들이 반창에 오줌을 누거나 토를 해놓고 갔던 것은 내 기억에만 해도 몇 건이 있고, 뭐가 궁금한지 그 반창으로 집안을 들여다보던 이상한 놈들도 있었다.


당시엔 부모님이 맞벌이를 나가시고 누나가 대학교에 다녔는데, 그래서 그 집에서 나는 유독 혼자 보낸 시간이 많았다. '스낵면'이라고, 아직도 파는 가장 싼 라면을 매일같이 먹으면서 나름 최적의 레시피를 찾았던 기억도 난다. 관에서 키웠던 햄스터가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지가 낳은 새끼들을 모조리 잡아먹었던 끔찍했던 기억도 있고. 그리고 한 번은 길 건너 빌라에 사는 학교 친구를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을까 후회되고 부끄러운 기억도.


그리고 그중에서 아직도 가장 충격적으로 남아있는 기억은, 반지하를 전전하던 가운데 당시 대학생이던 누나의 입이 돌아가버렸던 사건이다. 아마 구안와사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누나가 소리쳤고 그 소리를 듣고 갔던 엄마도 소리를 쳤었다. "어머 어머". 그때 누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건 아마 충격받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 뒤로 누나는 한참을 침을 맞으러 다녔었고, 다행히 언젠가 되돌아왔다. 반지하의 습하고 어둑한 생활이 얼마나 인간에게 별로인지- 그 축축하고 곰팡이와 뒤섞인 공간이.




#03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반지하 : 산자락 판자촌


말했다시피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아마 세 번째 반지하는 중학교 1~2학년 즈음일 것 같은데, 역시나 정확하지 않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의 기억이 모두 뒤죽박죽이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세 번째 반지하 집은 그나마 좀 나은 상황이었다. 반창이 아니고 전창에 가까웠다. 하지만 창문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동굴처럼 땅속에 묻혀 있었고 설명하긴 어려우나 계단식 논과 같이 한쪽 언덕배기를 따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그런 낮은 집들이 었다.


얼마전 철거됐지만 실제 살았던 동네 중 남아있는 일부 집들의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오른쪽 편의 집들처럼, 반쯤 땅에 묻혀 있는 집들이 계단처럼 언덕을 따라 이어진다.

요즘에도 타운하우스나 단독주택 단지들이 언덕을 따라 줄지어 있지만 내가 살았던 집과는 다르다. 축대와 옹벽을 쌓아 집을 양지바르게 짓기 어려운 사람들이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땅을 파고 들어가 반쯤 지하로 만들었던 것이다.


저런 집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있어 어디로 가든 통했지만 어디로 가든 난감한 상황에 마주쳤다. 보통은 힘없는 사람들이 사는데 험한 꼴이 난무하는 곳이었고  가끔 사나운 개들이나 술주정뱅이 아저씨와 마주치면 돌아가기에는 참 어려운 곳이었다.


엄마는 근처에서 옷가게를 하시기도, 떡볶이 가게를 하시기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떡볶이 가게도 1/3쯤 땅에 묻혀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도로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그런 곳에 약간 땅에 묻힌 가게였으니 매연이며 먼지며 가득했었을 것 같다. 버스나 트럭이 지나가면 유리문이 덜덜거리며 떡볶이 가게가 움츠렸던 기억이 난다.  요즘처럼 비가 오면 도로를 따라 구정물이 된 빗물이 가게 옆을 세차게 지나갔었다.


다시 집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기억을 더듬어보면 집 구조가 참 특이했다. 두 개의 긴 방이 젓가락처럼 나란히 붙어있었고 양 끝이 문으로 통해있었다. 그 긴 방의 끝쪽에 창문이 나있었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항상 노을빛이 들어왔던 것으로 봐서 서쪽을 바라보는 집이었던 것 같다.


이 집에 관해서는 가장 강렬한 기억 한 가지만 남아있는데, 가위에 눌렸던 경험이다. 잠을 자다 눈을 떴는데 내 얼굴 바로 앞에 여자 귀신이 쳐다보고 있었다. 몸은 꼼짝할 수 없었고 나는 무서워서 겨우 눈만 꾹 감았는데, 그 귀신이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가면서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온몸에서 땀이 나고 너무 공포스러웠는데 한참을 그렇게 시달리다 아침이 밝았다. 그 집에 대해선.   


동네가 항상 무서웠다. 기력 없는 노인들과 술주정뱅이, 목줄 없는 개들, 기괴한 장식들, 깨진 유리창, 조각보처럼 얼키설키 얹어놓은 쓰레트 지붕.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고, 그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그 동네의 풍경이 그랬다.




반지하를 살았어야 했던 이유.


최근 폭우로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입고 안 좋은 소식도 들리니 기분이 안 좋다. 영화 '기생충'을 봤을 때도 그들의 상황을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의 기억들이 폭우에 뒤섞여 떠내려가는 쓰레기들처럼 떠밀려와 머릿속 굽이진 곳에 걸렸다.


왜 나는 반지하에 살았을까. 아니 우리 부모님은 왜 반지하를 선택하셨을까.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가신 걸까. 이제는 '원망'이 남아 있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보니 삶이라는 게 맘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매일같이 깨닫고 있으니까. 의 부모님도 맘대로 되지 않아 떠밀려 떠밀려 반지하까지, 그리고 좀 더 외곽에 있는 반지하까지 이사하셨을 것이다.


내가 아는 부모님은 삶에 최선을 다하셨다. 슈퍼, 분식점, 옷가게, 택시, 진짜 인형 눈 다는 부업에 식당일까지 맞벌이하며 사셨고, 엄마는 새벽이면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의 부모님은 잘 사는 방법을 모르셨고, 적당한 기회를 만나지도 못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몇 백만 원 하지도 않았을 지하방에 세 들어 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사서 가지고 있었으면- 그게 더 나았을 텐데.


지금은 떠난 그 동네를 로드뷰로 보니 내가 살던 셋방들은 다 없어지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아파트들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 동네가 이렇게 좋아. 우리 아파트 단지는 이렇게 편리하고 아름다워. 그래서 우리 아파트는 값이 이만큼이나 비싸!" 라며 자랑을 하고 있다. 30년 전엔 내가 꼽등이처럼 살던 형편없는 동네였는데 말이다. 반지하에 판자촌이었단 말이다.


어떤 부모가 그런 축축하고 침침한 곳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싶어 하겠는가. 당연히 지금 반지하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람들도 매끈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아침이면 햇볕이 거실 복판까지 기어들어오는 그런 집에 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경제교육과 전문기술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들에게 적합한 기회가 포착되지 않는 것을.


그 많은 현대판 혈거인들 앞에서, 특히 이번 수해를 입은 안타까운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 몇 년간 반지하를 없애겠다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반지하에 살아보고, 그곳을 탈출하려고 고군분투 분골쇄신했던 부모를 옆에서 봤던 내 생각에는- 지하를 없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경제교육을 시키고, 기술을 가르치고, 균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뜰채처럼 짜임새 있는 사회보장이 그들을 급류에서 건저 낸다면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살고- 혹은 누구는 좋은 집에 살고 다른 누구는 반지하에 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얼마나 잘 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국민 모두가 풍요롭게, 인간답게 살고 있기도 하지 않는가.


그들이 반지하를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괜히 반지하는 없앨 필요도 없다. 혹시 전쟁이 난다면 나 같은 사람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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