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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Nov 10. 2022

가장 늦은 때에, 제일 낮은 곳에서



사회라고 한다면 자신의 능력대로 앞서가고 먼저 갈 수 있다. 특별히 비난받을 일도 아니고 각자가 자신의 능력대로 살아가는 곳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결혼을 해서 책임져야 할 가정이 생기면 마냥 친구들과 함께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달리기를 하는데 가장 느린 친구와 다 같이 뛰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여럿' 키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 아이들 중 어떤 아이가 좀 느리다고 해서 빼놓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키가 작거나 발달이 느리거나 아프다고 해서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가 하나 둘이라면 특별히 그런 경우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이가 넷이 되니 이런 경우가 자주 생긴다.


항상 가장 느린 아이에 맞춰 우리의 출발 시간이 정해지고, 가장 낮은 능력치에 맞춰 우리의 활동 범위가 정해진다. 예를 들면, 세 명의 아이가 빨리 일어나도 한 명이 늦잠을 자면 그 늦잠 잔 아이를 기준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또 아직 막내들이 어려서 많이 걸을 수 없기 때문에 계단이 있는 산책로나 등산은 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나와 아내 중 한 명은 앞서가며 '본대'를 이끌어가며, 다른 한 명은 가장 늦거나 낮은 아이를 챙기며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체의 속도가 가장 부족한 사람을 기준으로 통일이 되는 것.


이런 것들을 통해서 개개인이 많은 것들을 손해 본다고 생각했다. 가령, 첫째-둘째 아이는 막내들 때문에 그 좋아하는 산에 놀러 가는 것이나 수영장 가는 것을 못한 지 1년이 넘었다. 막내들이 차에 오래 앉아 있기는 어렵기 때문에 늘 1시간 이내 거리까지만 이동을 하는 행동반경도 정해져 있다. 레고를 하고 싶어도 동생들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집어먹어 버리니 큼지막한 듀플로를 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이 나는 일종의 '손해'라고 생각했다.


굳이 능력치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경우는 또 발생한다. 바이오리듬이나 그날그날의 컨디션으로 발생하는 것들이다. "자 이제 준비 다 했으니 출발하자!"라고 외치는 순간 응가가 마렵다고 화장실에 가는 아이, 신발을 신기려는데 기저귀에서 응가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막내- 뭐 이런 경우라든가. 이제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네 아이 모두 차에서 잠들어버린 경우. 정말 난감하고 돌아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나만 사도 될 것 같은 물건의 경우에도 가정의 평화와 각자의 자아를 위해 굳이 네 개를 사야 하는 경우. TV를 보는데 형은 이게 보고 싶고, 동생은 저게 보고 싶은 경우. 식당에 가는데 늘 여섯 명이 앉을자리가 있어야 하고 맵지 않은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에만 갈 수 있는 것. 이런 것들 또한 우리 가족의 활동과 발전에 제약을 주는 필터로 작용한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도 희생정신이 별로 없는 나의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손해'라고 생각했고, 그중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나와 첫째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첫째 아이가 희생하는 부분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늘 양보, 늘 희생하며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나가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득,


첫째 아이가 동생들을 챙기고 살피고 다치면 치료해주고. 또 음식도 먹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와 우리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늦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뒤쳐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의 구성원들은 다른 사람들은 쉽게 배우지 못하는 것들을, 특히 함께 살아가면서 굉장히 필요한 것들을 배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늦게 출발하고 조금 늦게 달릴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동아이들보다 갖고 싶은 것들을 덜 갖고,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는 못하겠지만. 또 영어학원을 보내거나 책을 읽어줄 시간이 부족하지만 이 아이들이 사람답게 크겠구나- 생각한다. 앞서 나가는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을 테고, 우리 아이들은 또 그 나름대로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언제까지고 뒤처져 있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핍은 또 다른 자극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또 인간다우면서도 더 능력 있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장 늦은 때에, 가장 낮은 곳에서 항상 함께하는 우리 가족은 다른 차원에서, 다른 트랙에서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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