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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Nov 24. 2022

아내와 엄마 사이 : 중립이 되는 시간

중립이 되는 시간 : 엄마와 아내 사이



물론 나에겐 중립기어란 없다. 편을 나누는 것은 별로지만 굳이 편을 나누자고 한다면 나는 온전히 아내 편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 하나만은 너의 편이 되어준다는 '남편'이다. 남편 소리 들으면서 남의 편이 되는 경우는 없다. 나는 확실히 언제나 정확하게 아내 편이다.


하지만 마라고 한다면 '남'은 아니라 아내 편을 들기에 애를 먹는다. 아내와 엄마 사이,  일단 줄다리기가 시작면 아내 쪽에 줄을 당기곤 했었다. 남편의 본분을 다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같이 줄을 당기는 것이 정령 아내를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다. 불똥은 내가 아니라 아내에게 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내 편이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후에 중립을 유지하며, 양쪽의 줄다리기 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더 유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를 걸어 다니며 연신 부채질을 해대는 것이 위태위태하다. 형을 잡는다고 팔랑거리는 부채질이 혹여 불난 집에 부채질은 아니어야 할 텐데.


출처 : 오마이뉴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내 편이다. 아내 편. 아내 편이지만 반 평생 같이 살아온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알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온전히 아내 편이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부디 줄다리기 말고~ 서로 손잡아 단체 줄넘기를 하면 좋을 텐데. 고부간에 감정이라는 것은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어려운 문제라서 아인슈타인이 돌아온다 해도 메롱을 하며 도망갈지 모르겠다.


(써놓고 보니 말이 엄청 장황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내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보니 일부러 돌려 말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딱히 수정은 안 했다. 나의 이 조심스러운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물론 성격 좋고 수더분한 아내 덕분에 많은 부분을 넘어가면서 살 수 있고, 편으로 역시 성격 좋은 잘 식혀주는 엄마 덕분에 벗어나면서 살 수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뭔가에 의해 감정의 흙탕물이 끓어오르고 난 후, 나 마음 한 구석 퍽이나 퍽퍽하다.


고부간의 감정선이라는 것이 아주 미묘하다. 아무리 선의로 상대를 대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순식간에 스텝이 꼬여버리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찾아오신다거나, 고향집에 방문한다거나, 아내가 낮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고 한다면 '걱정'부터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걱정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시나, 불씨가 된다.


아주 작은 불씨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낙엽이 바스러지고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계절에는, 불씨든 화염방사기든 바람 한 번에 초가삼간 다 태울 수 있다. 결과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우선 아내와 엄마 사이에 어떤 접점이라도 생기고 나면 그런 불씨들이 생겨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접점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만나지 않고, 연락하지 않고, 교류하지 않는 것이 갈등의 가능성을 낮추는 임시방편이 되어왔다. 그렇게 나는 몇 년 동안 임시방편만을 추구하며 관계 속 감정노동 가운데 비겁한 임시직 노동자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임시직으로 결혼 8주년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역시나 속 넓은 아내와 뜻깊은 엄마가 상황을 타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감정노동의 당사자들이며 정규직이었다. 정의 최전선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근 옆에서 지켜본 아내의 모습 속에서, 임시직 근로자의 역량을 벗어나는 대범함과 사려 깊음을 보았다. 아내는 고맙게도 엄마를 한 땀씩 한 뼘씩 이해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뚜벅뚜벅 이해하기 시작했다. 생 가지고 가야 하는 건가- 생각했던 실뭉치의 실마리를 았다고 생각했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아내 안에 깊은 감동과 깨달음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감정노동의 임시직이었던 나는 8년 묵은 체기가 내려가는 듯, 연장을 반복하던 대출을 상황 하는 듯 해방감을 맛보게 되었다. (후-)


엄마와 아내 이야기만 나오면 한 걸음 물러서게 되던 내가 이제는 고개를 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날보다 함께 살아갈 날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아직 완전하지 않은 부분은 뭐, 괜찮다.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오히려 희망적인 대목이다.


앞으로는 중립이 되는 시간이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줄다리기가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줄넘기를 한다면 말이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여자- 아내와 엄마, 엄마와 아내. 그 사이에서 이젠 중립 말고 중심이 되는 시간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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