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마쳤다. 아, 사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사의 시작이고 끝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단순히 이삿짐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지는 건 돈만 주면 아저씨들이 옮겨다 주는 것이니까 이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사를 위해 물건을 버리기 시작할 때가 이사의 시작이고, 짐을 옮긴 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생활에 필수적인 시설들이 정상가동 되는 것 까지가 이사의 끝이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삶에서 정상적인 삶까지의 거리만큼이 내가 생각하는 '이사 기간'이다.
이사는 참 많이 했다. 초본을 떼보니 거기에 기록된 것만 서른 번이 넘게 주소지가 이전되었고, 초본에 포함되지 않는 군 내 숙소이동이나 해외파견 등을 포함하면 거뜬히 40번을 넘을 기세였다. 특히 결혼한 후에도 8년 간 8번의 이사를 했고, 덕분에 아이들의 출생신고지가 모두 다르고 주민등록번호 체계도 다르게 설정되었다.
마흔 살도 되지 않아 마흔 번을 넘게 옮겨 다니며 살았으니, 어찌 보면 어딜 가서도 뜨내기 혹은 한철 메뚜기 같은 방랑자 생활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고향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도 애초에 몇 안되거나 소식이 끊기기 일쑤였다. 고향집, 고향친구 뭐 이런 개념이 사실상 불분명해진 상태이다.
대학교 입학 전 이사는 [조금 더 안 좋은 곳]으로의 여정이었다. 주택에서 아파트, 아파트에서 빌라, 빌라에서 다세대 주택, 지상에서 지하로, 판자촌으로 밀려나가는 이사를 반복했다. 그땐 내 의사가 반영될 틈바구니가 없었기 때문에 생각 없이 부모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위성도시의 유목민이 되어 용달을 타고 옮겨 다니는 삶. 위성도시의 위성이 되어 돌고 도는 인생이었다.
육사에 입학한 이후, 생도생활 기간에도 특별히 '이사 횟수'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많은 '이동'이 있었다. 기숙사는 6개월마다 바꾸며 다른 친구들과 살아야 했고, 여름과 겨울에는 군사훈련을 다녔다. 훈련을 가서도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주 단위로 이 지역, 저 지역을 건너 다녔다. 만약 이런 '이동'을 '이사 횟수'에 포함한다면 이것 만으로도 30번은 넘을 것이다.
임관 후에도 경계소초와 영내 독신숙소, 영외 독신숙소, 이 부대- 저 부대- 하며 1년에 한두 번씩 옮겨 다녔다. 아마 내 기억으로 딱 이때 까지가 차 없이 도수로 이사가 가능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따블백에 캐리어, 나보다 앞서 그곳에 도착해 있을 택배 한 두 박스 정도면 이삿짐 끝이었다. 과도하게 가지면 버리고 떠나기 일쑤였기 때문에 늘 과도하지 않게, 언제든 정리하고 떠날 수 있게 행랑 같은 짐으로, 캠핑용품으로 군 숙소에서 지냈다.
그러다 결혼을 하니 모든 것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냉장고가 생겼고 식탁이 생겼다. 옷장과 서랍장에는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처럼 짐이 차올랐다. 내 몸도, 그리고 마음도 더 이상 떠돌이가 아닌 정착민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첫 신혼집은 꽤 길어 2년이나 거주했다. 전남 장성에 18평짜리 관사였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서 정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착각이었다. 함께 지내고자 했던 각종 화분들이 가장 먼저 처분 대상이 되었다. 이때 한참 선인장에 취미가 있었는데 수많은 선인장 화분들이 자가용에 올랐지만 또 그만큼 많은 선인장들을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올 수밖에 없었다. 블루베리 농장에서 산 블루베리 나무, 과수원에서 산 자두 묘목 등 그 외 많은 식물들도 함께 길을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 후 이사는 반복 또 반복되며 8년 간 8회가 되었다. 그 많던 선인장 중 대다수가 이사 도중 몸살을 앓거나 해가 들지 않는 관사들에서 냉해를 입으며 죽어나갔고, 간-신히 두 개(은총 반야, 귀면각)만 살아남았다. 한 곳에 뿌리를 박으면 평생 움직이지 않고 사막 한가운데서 우뚝 섰을 녀석들이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 살아남은 것을 보니, 이 녀석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사의 고수가 아닐까 싶다.
다행이다 싶어 짐정리가 끝나고 화분에게 적당한 자리를 잡아 주려고 들어 올렸는데, 아끼던 은총반야 선인장이 픽 쓰러진다. 쓰러진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뿌리가 다 상해서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다. 뿌리를 자르고 말리고 소독해서 다시 살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사의 고수들도 살아남을 수 없는 혹독한 여정이었나 보다.
또 이사의 고수가 누가 있을까- 둘러보니 아내가 혼수로 사 온 냉장고와 식탁, 서랍장들이 있다. 잦은 이사로 수도 없이 찍히고 스크래치가 났지만 그래도 정상작동하며 본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외관이 상한 건 전쟁 같은 이사 속에서 살아남은 훈장 같은 것들이리라. 이들이야 말로 여덟 번의 이사 속에서 살아남은 이사계의 백전노장들이다.
그리고 또 누가 있나 했더니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아내는 원래도 여행과 이사를 좋아한다고 한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데 거리낌이 없다. 고향을 떠나 남편을 따라다니며 매번 뜨내기가 되어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따라 이사를 다닌다고 하니 고마우면서 미안한 감정이 자박자박하다.
첫째 아이는 올해 학교를 들어가는데, 지금까지 다녔던 어린이집이 여섯 곳이다. 군인 자녀들 전학 많이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너무 매운맛을 보여준 건 아닌가-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둘째도, 셋째 넷째도 마찬가지다. 막둥이들도 아직 두 돌이 되지 않았는데 다음 달부터 두 번째 어린이집에 등원을 하게 된다. 전학과 전원은 이 아이들의 숙명일지 모른다. 아마 머지않아 전국을 유랑하는 '우리 집'이라는 배에 유능한 선원들이 되어 있지 않을까-
이사만 40번도 넘게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많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짐을 싸고, 옮기고, 정리하는지 알고 있다. 이사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이사는 어떻게 하는지- 이사를 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련의 메커니즘이 되어 척척 이뤄진다. 세탁기, 정수기, 식기세척기 등 설치하지 못하는 가전이 없고 집에 있는 시설들 중 고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을 때 먼저 파악해야 하는 정보들이 우선순위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환경이 바뀌고 집이 바뀌고 이웃이 바뀌더라도,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은 내 곁은 지키는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번 이사를 마치고 또 한 번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살아본 집 중 가장 좋은 집이라 기분이 좋다. 언제고 나와 함께해 줄 아내와 아이들에게 조금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되어 매우 감사하다. 항상 나와 함께해 줄 나의 가족들에게 앞으로도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 나의 숙명이 이사라면, 앞으로는 더 좋은 곳으로의 이사만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