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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條約)과 늑약(勒約)

1월 2주

by 광천선생

올해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지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伊藤博文(이등박문; 이토 히로부미)이 을사 5적과 결탁하여 고종 황제를 협박,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입니다.

그런데 이 명칭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약’이 아니라 ‘늑약’이라고 해야 맞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전적 해석상 ‘조약(條約)’은, ‘국제법 주체 간에 국제 법률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문서에 의해서 명시적으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약’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대등한 자격의 둘 이상의 국가가 전제되어야 하며, 또한 이것은 어떤 강제력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체결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의 합의에 따라서 맺게 되는 일종의 국가 간 약속입니다. 이 조약이 체결되면 법적 구속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을사조약’은 자율적이며 대등한 관계에 있는 양국이 체결한 것이 아닙니다. 고종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강압적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듭한 강요에 고종은 끝내 ‘정부에서 협상하라’고 책임을 넘겼으며, 이에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문건에 서명,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림 3.png 한일협약도(韓日脅約圖) : 일본이 대한제국 황제를 위협하여 조약을 강제로 제정함(신한민보)

이와 같은 정황을 고려해 본다면, ‘조약’이라는 국제법상의 명칭은 이 사건에 적합지 않습니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명칭이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늑약(勒約)’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한자 ‘륵(勒)’은 <굴레>, <재갈>의 의미를 가진 글자이며, 여기에서 <강제로 하다>의 의미가 파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는 절대로 조약이 될 수 없고 ‘늑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권 침탈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일제가 사용한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큰 고민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 속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길은 멀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관성적으로 역사를 볼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역사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덧붙임) 이 늑약의 결과로 설치하게 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한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 바로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에서 척결된 인물입니다. 그 의거를 다룬 영화 <하얼빈>(2024.12.24 개봉)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으니.....그나마 마음에 위안을 얻습니다.

<하얼빈>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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