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준비에 관한 이야기
여행에서 가장 설레고 행복한 순간은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것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여행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기대감이 커지기 시작해서 여행을 준비하면서 점점 부풀어 오르다가 공항에서 그 정점을 찍고서는, 막상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어 행복한 상상이 냉정한 현실이 되는 순간부터는 여행은 희로애락의 도가니탕이 된다. (어쩌면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 기내식으로 사육당하면서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그리워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여행을 준비하는 그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누리고자 여행 출발 수 백일 전부터 여행 준비 모드에 돌입했다.
딱히 미래에 대한 준비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떠나는 여행이었던 만큼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했었다. 현재의 안정을 추구하는 나와 반복되는 생활에서 일탈을 꿈꾸는 나의 끊임없는 설득전 중에 덜컥 세계일주를 출발하는 항공권을 결재해버렸다.(Thanks, 우유부단한 나에게 방아쇠를 당겨준 에어아시아의 반값 프로모션)
무려 일 년 뒤에 출발하는 항공권이긴 했지만 그것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날’을 잡게 되었고, 그날부터 마치 당연한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여행을 준비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 친한 친구는 물론 부모님도 몰랐던 나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 내에서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살 사람처럼 평범하게 회사일을 하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대형 세계지도가 걸려있는 서재에서 여행 정보를 수집하고 여행 경로를 수없이 다시 그리면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년이 넘는 장기 여행을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준비할 게 거의 없기도 했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자세히 조사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도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인해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짧은 일정의 여름휴가를 준비하듯이 꼼꼼하게 동선을 짜고 조사를 하기에는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길은 너무도 길었다. 현지에서 정보를 얻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 다니는 것이 오히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니 미리 준비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큰 그림의 루트와 각 국가별 출입국 정보, 주요 거점 도시 등의 최소한 준비는 필요했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가고 싶은 곳을 정하는 일이었다. 책에서 읽었던 그곳, 친구가 흥미진진하게 얘기해주던 그곳, TV에서 나를 유혹하던 그곳들을 지도 위에 하나하나 점을 찍어 보니 이건 1~2년으로 가능할 일이 아닐듯하게 보였다. (누구나 마음속에 가보고 싶은 장소가 수백 개쯤은 있지 않은가! ) 그중에서 아직 섣불리 용기가 나지 않는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쉽게 접근이 가능한 동남아시아, 너무 넓어서 감당이 안 되는 북미, 중국은 이번 여행에서 제외했다.
지도 위에 흩어져서 찍힌 점들을 그룹으로 묶고 다시 선으로 잇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점점 여행 경로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리고 가능하면 여행 중에 겨울을 만나지 않도록 여행 시기를 조정했다. 수없이 수정을 반복한 결과 세계지도 위에 한국에서 출발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한붓그리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여행 경로가 대충 정해진 후로는 개별 여행지에 대한 조사를 했다. 여행 중에 경로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기에 추천 숙소, 먹거리, 볼거리와 같은 디테일한 정보보다는 지리, 역사, 경제 상황 등의 개괄적인 자료를 찾아보았다. 인터넷 상에서 여행지를 검색하면 '어디가서 이거 보고, 저거 먹었어요' 식의 블로그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초고속 인터넷보다 도서관이 더 빨랐다. 나의 형편없는 기억력 때문에 머릿속에 오래 새겨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얄팍한 지식마저도 여행지에선 나에게 기가 막힌 맛집 정보보다도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들의 배경을 안다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우리와 다른 문화로 인해 비합리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상황들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며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여행 출발일이 다가오면서부터는 보다 현실적인 준비과정이 이뤄졌다. 일 년이 넘는 동안 모든 살림살이를 담아줄 튼튼한 배낭을 구입하는 일부터 풍토병에 대비하기 위한 예방주사, 여행 경비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해줄 은행 계좌, 신용카드를 만드는 일, 여행용 노트북과 카메라를 구입하는 일, 여권 만들기, 비자 신청, 여행자 보험 가입 등등 여름휴가를 준비할 때에 비해서 할 일이 꽤 많았었다. 다행히도 오랜 기간을 두고 여유롭게 준비했기에 일주일에 한 가지씩 미션을 수행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준비할 수 있었다. (마치 게임에서 던전에 입장하기 전에 아이템을 하나둘씩 모으는 희열) 심지어 여행 중에 스쿠터를 빌려서 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난생처음 오토바이 운전을 배우기도 했고, 스쿠버다이빙을 대비해 평소에 끼지도 않는 컨텍트 렌즈도 준비했다.
출발을 두 달 정도 남긴 시점, 세계일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근거리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 계획을 알리고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었다. 마치 반전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나의 말에 지인들은 놀랬었고, 부모님은 등짝을 치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회사에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오래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 1번은 세계일주였고, 2번은 유치하게도 '세계일주를 사유로 사표 쓰기'였다. 그 이유는 내가 만약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다면, 무능력에 의한 해고, 처우에 대한 불만이나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무언가 때문이길 바래서였고 그 무언가가 세계일주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회사생활은 적성과 흥미에 잘 맞는 일과 존경해 마지않을 직상 상사와 유쾌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늘 즐거웠다. 그랬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나서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막상 사직서를 제출한 후에도 후련함보다도 아쉬움이 더 컸었다. 그렇게 해서 요즘 세태를 역행하는 자발적 백수가 되었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더 이상 출근할 곳이 없어진 날부터 여행을 출발하기까지 3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충분할 줄 알았던 3주는 정말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지나갔다. 퇴사 후의 연금, 의료보험 등의 뒤처리, 여행 중에도 발생할 고정 지출을 대비한 은행 업무, 장기 여행에 대비한 건강검진, 집 및 자동차 정리하기, 관리비 및 세금 정산, 통신 계약 해지, 부재중 주소지 변경 등등 할 일이 끝이 없었다. 잠시 자리를 뜨려고 돌아보니 그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내려왔던 뿌리가 꽤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끊어내지 못할 만큼 뿌리가 자라기 전에 여행을 결심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평소에는 못 느꼈었지만 떠나려고 보니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여행 출발 전날에서야 온 집을 난장판을 만들어가면서 배낭 꾸리기를 끝내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채 새벽녘에 집을 나섰다. 그렇게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길 위에 서게 되었다.
예전에 지금보다도 더 겁이 없던 때에 번지점프를 했던 적이 있다. 아슬아슬한 다리 한가운데에 서면, 깊게 패인 협곡 아래로 에메랄드 빛의 강이 흐르는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찔한 높이에 겁이 나긴 했지만 그림 같은 풍경은 나를 점프대에 서게 만들었고, 체중을 재고 다리에 줄을 감는 동안 무척이나 두려웠지만 두려움보다도 호기심과 설렘이 더 컸기에 주저 없이 점프대 끝에 설 수 있었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면서 두려움과 후회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다가 몸이 점프대를 떠나 더 이상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 모든 두려움과 미련을 내려놓고 그 순간을 받아들이면서 즐기게 되었다.
비행기가 지면에서 이륙하는 순간, 오래전에 번지 점프대에서 발이 떨어지던 순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