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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Jun 20. 2016

나의 업보는 몇 kg 일까?

여행자의 짐에 관한 이야기


 여행자들 사이에서 '배낭의 무게는 자신의 업보와 같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아마도 누군가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물건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인 걸까? 사실 여행의 목적과 기간에 따라 배낭의 무게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에 자신의 무거운 배낭을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도무지 양보할 수 없었던 나의 업보는 대략 25Kg 정도였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배낭에 들어갈 물건들 때문에 아내와 티격태격했었다.


 :  세상 어느 곳이나 다 사람 사는 곳이기에 굳이 필요한 물건을 다 싸들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내 : 어딜 가나 있는 물건이지만, 어차피 지니고 다녀야 할 물건이면 집에 있는 것을 들고 가는 게 좋잖아!


 당장 눈에 보이는 짐을 줄이고 싶어 하는 나와 장기 여행인 만큼 사소한 물건도 결국 필요할 테니 챙기자는 아내의 대립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까지 이어졌다. 결국 두 사람의 대립 속에서 정당한 사유를 확보한 물건들만이 배낭에 담겼으나 그 역시 적지 않은 양이었다. 여행 중에 읽고 싶었던 책들은 전자책으로 대체되었고, 남반구와 북반구를 오가면서 가능하면 여름만 다니겠다는 계획에 두꺼운 옷은 챙기지도 않았으며, 무거운 DSLR 카메라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앞 뒤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업보의 무게에 휘청여야만 했다.


여행을 출발하던 날에서야 완성되었던 배낭


 장기 여행이라고 특별히 짐이 많을 이유가 있을까? 꼭 필요한 것만 들고 가고 그때그때 사서 쓰면 되지 않나?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나 역시 한 달 이내의 짧은 여행에서는 30리터급의 작은 배낭 하나만 들고 다녔었다. 하지만 여행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샘플이나 소용량으로도 충분했던 세면도구, 화장품 등은 집에서 쓰던 사이즈와 비슷해지고, 항공권 예약이나 은행업무 처리, 사진 정리 등의 목적으로 노트북도 챙기고, 사소한 생필품도 하나 둘 넣다 보니 커다란 배낭이 가득 차게 되었다. 필요할 때마다 사서 쓰고 미련 없이 버리고 가면 적어도 짐이 늘어나지는 않을 텐데, 궁상맞은 배낭여행자는 수십  고민 끝에 산 물건들에 미련이 남아서 배낭 한 귀퉁이에 세를 주고 내 어깨 위에 올라 태워 버렸다.


옷가지와 생필품들은 작은 천가방에 싸여 배낭안에 차곡차곡


 여행 초반에는 이 거대한 배낭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고생이 많았었다. 스리랑카를 여행하면서 짐칸도 따로 없는 로컬버스와 혼돈의 3등석 기차를 타고 내릴 때마다 창밖으로 집어던져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다 뚝뚝(삼륜 오토바이 형태의 탈 것)이라도 타면, 내 몸만 한 배낭과 나란히 앉아서 내가 짐을 들고 이동을 하는 건지, 짐이 나를 타고 다니는 건지 한숨이 나왔다. 노트북과 여권, 비상금 등이 들어있던 보조가방은 행여나 혹시 다른 사람 손에 닿을까 꽁꽁 껴안고 모시고 다녀야 했으니, 이쯤이면 여행 중이 아니라 운송 중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끝내 배낭의 무게에 적응하지 못한 아내는 다른 여자들이 명품백을 고르고 있던 파리에서 튼튼한 캐리어를 골라 어깨의 짐을 바퀴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두어 달을 고생하다가 잔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이집트 다합에서 카이로까지 약 15시간의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길이었다. 수시로 테러가 발생하는 이집트 정세 때문인지 잠들만하면 군인들이 올라타서 검문검색을 했기에 몹시 피곤했다. 심지어 시나이반도에서 대륙으로 넘어가는 수에즈에서는 깜깜한 새벽에 모두 내려서 짐칸의 짐까지 모두 꺼내 검문검색을 받아야 했고 여행자인 나도 예외 없이 수색견 앞에 배낭을 모두 뒤집어야 했다. 잠도 못 자고 시달리다 카이로에 도착했지만, 하이에나처럼 우리를 노리던 호객꾼 들과 터무니없는 바가지요금을 십여 분간 흥정을 해서 택시를 탔지만 결국 택시에서 내려 멱살잡이를 해야 했었고, 미리 알아봐 둔 숙소는 만실이라는 뚜껑 열리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이집트가 여행자의 지옥이라더니...) 대로변에 망연자실 앉아서 앞에 널브러진 짐들을 보고는 이 뭉탱이들을 모시고 이 험난한 이집트를 돌아다닐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카이로에 묵었던 숙소에 큰 배낭을 보관해 주길 부탁하고 보조 배낭만 들고 이집트를 여행했다. 역시 짐이 가벼우니 돌아다니기 훨씬 수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는 결코 만만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졸리고 힘들어도 떨어질 수 없는 배낭


 어깨를 가볍게 여행하는 것이 이렇게 달콤하다는 것을 깨달아서였을까? 이집트에 이어서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친절한 호텔 주인에게 나의 살림살이를 한 달 반을 맡기고는 터키와 불가리아를 여행했었다.


 : 주인 양반, 짐 좀 맡깁시다.

호텔 : 예 그러시죠. 다들 체크아웃하는 날엔 짐을 맡겼다가 저녁에 찾아서 야간 이동하고 그러더군요.

 : 아니, 난 한 달 정도 뒤에 찾으러 오겠소. 어쩌면 더 늦어질 수도...

호텔 : 뭐라고? 이거 혹시 폭발물이나 마약 이런 거 아니지?

 : 터키 여행하러 왔는데 짐이 많아서 그러니 좀 부탁합시다.

호텔 : 예... (그럴 거면 뭐하러 들고 왔냐?)


 장거리 이동이 많았던 터키에서 무거운 배낭이 없이 여행하는 것은 정말 좋았다.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숙소를 찾아가는 길도 택시나 버스를 탈 필요 없이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고, 숙소에 도착해서도 체력이 방전되지 않아서 곧바로 동네 마실을 나설 수 있었다. 20~30분이면 짐 정리를 끝낼 수 있었기에 체크아웃하는 날도 여유로웠다. 도시 간 이동이 두렵지 않으니 여행이 신나기만 했었다.


 파리에 도착하여 리스 계약을 해두었던 차를 인도받아 자동차 여행을 시작되면서 진정으로 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낯선 땅에서 운전하는 어려움보다 더 이상 배낭을 메고 대중교통을 안 타도된다는 기쁨이 훨씬 컸기에 길을 잃거나 주차장을 찾아 헤매도 불만이 없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의 한계가 배낭에서 자동차 트렁크 크기로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마트에서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식재료도 마음껏 살 수 있었고, 늘 500ml 사이즈로 사 먹던 생수도 5리터짜리 대형 포장으로 차에 싣고 다니게 되었다. 직접 식사를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은 부부 배낭여행자에게 식재료를 맘껏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질의 급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좋은 점을 들자면, 짐을 들고 버스나 기차로 이동할 때마다 소매치기나 강도를 늘 경계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웠는데, 모든 짐을 차에 넣고 직접 운전해서 움직이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물론 유럽의 빈번한 자동차 절도 때문에 주차할 때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등에 메는 것도 아니니 터질 때까지 채워보자


 유럽을 떠나면서 나의 묵직한 배낭은 다시 차 트렁크에 나와서 등 뒤에 매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럽에서 아내가 배낭을 포기하고 캐리어를 끌기 시작하면서 무거운 물건들은 캐리어에 옮겨서 바퀴에 의존하였기에 배낭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철석같이 믿었던 캐리어는 중남미 도시들의 울퉁불퉁한 도로와 비포장길을 다니면서 바퀴가 조금씩 망가져갔고, 급기야 여행 막바지에는 바퀴가 움직이질 않아서 질질 끌고 다녀야만 했다. 출발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배낭이 아니면 남미 여행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비행기 못지않은 훌륭한 장거리 버스와 저렴한 시내 교통수단 덕분에 캐리어로도 크게 불편하지 않게 여행할 수 있었다.  (물론 배낭이 훨씬 편하긴 하지만 캐리어라고 딱히 못 갈 곳은 없다.)

-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중남미를 여행할 계획인데 도저히 배낭을 메고 다니기 힘들다는 분이 계시면 걱정 말고 캐리어를 들고 가시면 됩니다.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내 손에 항상 이상한 모양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그 가방은 과테말라의 아띠뜰란 호수변의 작은 마을인 '산페드로 라 라구나'의 재래시장 구석에서 우리 돈 960원에 구입한 플라스틱 양동이였다. 처음에는 빨래 좀 편하게 해보겠다는 생각에 샀는데, 어느새 장바구니가 되었다가 샤워하러 갈 때는 목욕바구니로, 버스 타고 이동할 때는 남은 식재료나 간식을 담아 다니는 만능 가방이 되어 버렸다.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여행하면서 무척 유용하게 사용했는데, 페루로 이동하는 길에 차마 양동이를 들고 비행기 타기가 민망해서 버렸었다. 하지만 이내 만능 가방의 위력이 그리워져서 새로 구입한 후로는 여행을 마칠 때까지 계속 들고 다니게 되었다. 공항에서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양동이를 검색대에 밀어 넣었고, 크루즈선에 승선할 때 선사에서 찍어주는 기념사진에도 나의 손에는 당당하게 양동이가 들려있었다. (보름이 넘는 항해 기간 동안 포토존에 계속 걸려있을 줄 미리 알았다면 내려놓고 찍었을 텐데...) 앞으로 다시 장기간 배낭여행을 한다면 플라스틱 양동이는 아마 출발부터 나와 함께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장기 여행 필수 아이템 만능 양동이, 놓치지 않을 거에요.


 대륙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문화권을 지나는 여행이었기에 가는 곳마다 특색 있는 매력적인 물건들이 많았다. 스리랑카의 실론티, 터키의 화려한 접시, 독일의 맥주와 소시지, 모로코의 가죽 가방, 페루의 알파카 스웨터, 브라질의 그 유명한 쪼리 샌들, 보츠와나의 목각 조각품 등등... 우리 부부는 그다지 쇼핑을 즐기지 않는 사람임에도 사고 싶은 물건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이동을 해야 하는 여행자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장기 여행 중에는 엽서 한 장 사는 것도 부담스럽고, 간혹 여행지에 만난 사람으로부터 선물이라도 받으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앞섰다. 여행 전에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돈이 허락하는 범위라면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는데, 여행 중에는 '지금 안 사면 두고두고 후회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건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매번 '정말 갖고는 싶지만 굳이 없어도 상관없다'로 결론이 났기에 여행을 출발 시의 배낭의 내용과 여행을 마친 후의 물건이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화장품과 샴푸 등의 상표가 바뀐 정도?) 여행을 하면서 배낭에 의해 내 소유욕이 다스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여행지에 가면 시장과 쇼핑몰, 기념품 가게는 빠지지 않고 방문했고, 눈으로 열심히 골라서 마음속에 가득 담아 나왔다. 손에는 잡히지 않지만 눈을 감으면 보이는 나의 기념품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든 들고 갈 수 있다. 좋다!


이 정도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 살더라도 문제 없어


 내가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산다는 것을 경험해보는 것은 사방이 온통 소비의 유혹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명한 소비의 기준이 되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과 없어도 되는 것에 대한 확실한 기준과 함께 나의 소유욕은 과연 합리적인 것인가에 자문자답 들은 앞으로도 나의 삶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된다.




 배낭 안의 짐만으로 1년을 넘게 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이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곳곳에 들어찬 살림살이가 다른 눈으로 보였다. 과연 내가 필요해서 샀던 걸까? 그냥 갖고 싶어서 샀던 걸까? 저것을 소유해서 정말 행복했던 걸까? 소유하면서 내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걸까? 어쩌면 여행 내내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이 나에게 소유가 아닌 존재 양식의 삶을 가르쳐주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많이 가지기 위해서 노력했었는데, 많이 가지지 않아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완벽히 이해했다.

정말 간단한 진리였다.

많이 가지면 무겁다. 무거우면 내려놓으라. 그럼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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