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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Aug 27. 2019

9. 쉬어가는 페이지

카티마 무릴로, 나미비아


 해가 높게 떠서 내 그림자가 한 뼘 정도로 작아졌을 때쯤에 에토샤 국립공원을 떠났다. 다음 목적지로 잡은 초베 국립공원이 있는 보츠와나의 카사네(Kasane)까지는 1000 km도 넘게 떨어져 있었다. 도저히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지도에서 나미비아를 찾아보면 마치 한쪽 팔을 펼쳐 든 사람의 모습처럼 동쪽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땅을 볼 수 있다. 에토샤에서 초베 국립공원에 이르는 길은 그 좁고 길게 뻗어 나온 나미비아의 동쪽 영토를 따라 달리는 길이었다. 그 긴 길 위에는 매력적인 관광지도 마땅히 머물만한 도시도 없었다. 나미비아를 직접 운전하며 돌아다니다 보면 나미비아라는 국호의 어원이 '엄청 넓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쩍 지나쳐갈 만 거리가 아니었기에 어딘가 거쳐갈 곳이 필요했다. 일단은 오늘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또다시 황량한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의 문화와 부족을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직선의 국경선이 눈에 띈다.


 이미 출발이 늦었기에 그리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위에서 밤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간신히 해가 지기 전에 에토샤에서 400 여 킬로미터 떨어진 룬두(Rundu)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룬두는 나미비아와 앙골라의 국경을 이루는 오카방고 강가에 위치한 작은 국경도시이다.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몹시 작고,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척 커다란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시골 읍내 같은 곳이었다. 황량한 땅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부족민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하거나 학교, 병원을 방문하기 위해 찾는 거점 도시 같은 곳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이 작은 동네에서는 캠핑장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강가에 위치한 도시에서 숙박 시설은 대게 강을 따라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기에 금세 꽤 괜찮은 캠핑장을 찾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텐트를 치고 간단하게 저녁을 만들어 먹고 나니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캠핑장에서 밤이 오면 딱히 할 일이 없다. 오랜만에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가는 캠핑이었더라면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밤공기를 느낄 수 있었겠지만, 캠핑 생활이 일상이 되어 버리면 어둡고 불편한 시간일 뿐이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는 깜깜한 텐트에서 나와 캠핑장 리셉션 근처의 휴게 공간에 가니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도 와이파이를 연결하여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족과 연락을 할 수 있고 여행 정보를 검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불과 몇 해전에만 해도 가이드북과 종이 지도를 들고 다니면서 길을 묻고 버스를 탔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러나 스마트폰으로 내일 이동할 경로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지만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구글신 마저도 나미비아의 동쪽 지역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니, 마치 그 누구도 가지 않는 미지의 영역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럴 때는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


강가에 있는 캠핑장이라서 인지 모기가 극성이었던 룬두의 캠핑장


 일찍 일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차려먹고 룬두를 벗어났다. 도대체 무엇을 볼 수 있을지 검색이 되지 않았던 나미비아의 동쪽 팔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국경선이 그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가늘고 긴 땅을 따라 600 km 이상을 달려야만 다음 목적지인 보츠와나에 닿을 수 있다. 정말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직선 위에는 이렇다 할 도시도, 마땅히 쉴 만한 자리도 보이지 않고 계속 지평선 끝의 점을 향한 도로 뿐이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뜬금없이 길가를 걷는 사람이 한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수 킬로미터 간격으로 작은 마을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작게는 2~3집부터는 10집 이상이 모여 사는 듯한 규모의 작은 마을들이 B8번 도로를 따라 자리 잡고 있었다. 좀 더 살펴보니 길가의 사람들은 아주 가끔 지나가는 사설 로컬 버스를 기다리거나 인근 도시로 가는 차를 얻어 타기 위해 도로변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마을 주변에서는 머리에 물통을 이고 물을 긷기 위해 맨발로 황무지를 걷는 아이들의 모습들이 자주 보였다. 흙벽에 짚풀을 얹은 작은 집들은 얼핏 봐도 살림살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집 주변의 가축들도 허름한 집들을 닮아 가냘픈 몸으로 나를 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억 만리에서 여행 온 이방인은 그들이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혹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어쭙잖은 여행자의 오지랖인가?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속인은 그들의 단출한 삶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끔 투어 상품으로 현지 부족의 마을을 방문하는 코스를 본 적이 있었지만, 문화 체험이라는 미명 하에 그들의 삶을 구경거리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삶 속에도 나름의 만족과 행복이 있으리라 믿는다.


달리는 차에서 본 모습만으로 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없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게 하는 작은 마을들이 점점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하늘과 땅을 나누는 지평선만 보이는 지루한 도로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서 나미비아의 동쪽 끝부분에 도달할 무렵, 룬두를 떠난 이후 드디어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동네인 카티마 무릴로(Katima mulilo)를 만났다. 오카방고 강가에 위치했던 룬두처럼 카티마 무릴로도 잠비아와 국경선을 이루는 잠베지 강가에 있는 국경도시이다. 크기도 분위기도 딱 룬두와 비슷한 이 도시는 마치 오전에 떠난 룬두에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랜만에 도시에 오자 룬두에서는 어제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가지 못했던  대형마트와 패스트푸드점을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의 패스트푸드점 답게 이름이 'Hungry Lion'이었다. 오랜만에 남이 해준 음식을 편하게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사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을 떠난 이후로는 식당에서 식사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아주 간혹 캠핑장에서 운영하는 간이식당을 가거나 이곳처럼 도시를 지나칠 때에 패스트푸드점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탓인지 어딜 가도 식당을 찾기가 힘들었기에 대부분의 끼니를 시장이나 마트에서 산 식재료로 직접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형마트가 우리나라의 마트와 거의 비슷한 규모와 구색을 갖추고 있어서 장보기가 무척 수월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기가 우리나라에 비해 무척 저렴했기에 마트를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 저녁은 스테이크 파티였다. 또 언제 대형마트를 만날지 모르니 기회가 될 때마다 항상 넉넉하게 식재료를 샀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대형 마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카티마 무릴로를 둘러보다가 잠베지 강가에 있는 멋진 캠핑장을 발견했다. 목적지로 삼았던 보츠와나의 카사네까지는 약 130km가 남았지만, 장거리 이동에 지친 몸으로 국경에서의 피곤한 일들을 겪고 싶지 않았고 마침 멋진 캠핑장을 발견한 김에 자리를 잡고 며칠 쉬기로 결정했다. 유유히 흐르는 잠베지 강가에 자리 잡은 고급 리조트에 딸린 캠핑장은 강을 따라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강가를 바라보며 캠핑을 즐길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이토록 아름다운 캠핑장을 사용하는 사람은 우리 부부뿐이었기에 마치 전세를 낸 듯이 제일 좋은 자리를 잡고 아무런 방해 없이 강을 바라보며 멍하니 쉴 수 있었다. 그동안 장거리 이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느지막이 일어나서 멍하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보내다가, 강 너머로 노을을 배경으로 고기를 굽고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와인을 마시며 여행 중의 달콤한 휴가를 보냈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쉬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게 일반적이기에, 휴가 중에 여행을 간다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있어도 여행 중에 휴가를 보낸다는 말은 참 어색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장기 여행자를 만나면 가끔 '여행 중에 잠시 쉬고 있어요.'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여행 = 휴식'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참 이상하게 들렸지만, 막상 내가 매일 낯선 천장 아래에서 일어나는 생활을 해보니 정말 아무런 일정 없이 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어릴 적에 두꺼운 만화책을 볼 때에 중간중간에 있던 쉬어가는 페이지가 떠올랐다. 이미 쉬면서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쉬어가는 페이지가 왜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쉬어가는 페이지 덕분에 잠시 멈추고 이어지는 내용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 쉬어가는 페이지는 나 같은 독자뿐 아니라 작품을 그린 작가에게도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잠시 흐름을 끊고 돌아보는 시간과 다음 이어지는 과정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은 여행뿐 아니라 어떤 일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리라. 그리고 이 여행이 내 일생 중에 멋진 쉬어가는 페이지로 그려지길 바라본다.


잠베지 강가의 캠핑장. 악어와 하마가 출몰한다는 경고로 물에는 발도 담그지 못 했다.
멍하니 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던 벤치와 잠베지 강의 노을


 잠베지 강가에서 며칠 쉬었더니 다시 기운이 났다. 다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원래 가려고 했었던 보츠와나의 카사네까지는 두세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이동에 대한 부담이 적었다. 떠나기 아쉬울 정도로 정이 들어버린 캠핑장을 뒤로하고 나미비아와 보츠와나의 국경인 응고마(Ngoma)로 향했다. 카티마 무릴로가 잠베지 강이 경계로 잠비아와 마주 보는 국경도시라면 응고마는 초베강을 끼고 나미비아와 보츠와나를 가르는 국경 관문이었다. 나미비아에 입국할 때는 복잡한 사전 비자를 발급받고 국경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세금을 내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출국 심사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장 '쾅'으로 모든 절차가 함축되었다.


 다시 차를 타고 초베강을 건너고 나니 곧바로 보츠와나 쪽 국경 출입국 관리소가 나타났다. 아프리카의 상징 같은 거대한 바오밥나무 아래 주차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보츠와나 입국 심사를 받았다. 초베 사파리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일까? 입국 심사를 받는 과정이 마치 동물원 사파리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입장권을 사는 기분이 들었다. 나미비아와는 다르게 보츠와나는 우리나라와 무비자 협정이 맺어져 있어서 어렵지 않게 통과했고, 마지막 절차로 야생동물의 천국인 나라답게 차량과 신발에 묻은 흙을 털고 소독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츠와나 영토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미비아-보츠와나 국경 관문
보츠와나 쪽의 출입국 관리소


 보츠와나 국경을 넘어서 카사네까지 가는 A33번 도로는 초베 국립공원의 외곽을 돌아서가는 길이었다. 카사네까지 한 시간가량을 달려야 하는 그 길에서부터 야생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소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 하더니, 웬 들개가 도로에 있나 하고 창문을 내렸다가 하이에나와 눈을 마주치고 소름이 돋는 일도 벌어졌다. 멀리 카사네가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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