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서 나미비아에서 보츠와나로 들어섰지만 크게 달라진 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고작 강 하나를 넘어오고서는 새로운 나라에 도착했다는 특별한 느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보츠와나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초베 국립공원 끝에 자리 잡은 카사네(Kasane)라는 도시였다. 처음 카사네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얼핏 나미비아와 비슷비슷한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감을 가질 수도 있는데, 조금만 유심히 사람들을 살펴보면 금세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리조트나 상점에서 만나는 현지인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저마다 챙이 넓은 모자와 카메라를 메고 있는 관광객의 얼굴은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다들 조금은 들떠 있는 듯한 분위기의 이곳은 바로, 사파리의 도시 카사네다.
카사네는 보츠와나와 나미비아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초베강이 잠비아와 국경선을 이루는 잠베지강을 만나는 합류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초베강 일대는 범람원을 따라 다양한 동물들이 야생 생태계를 이루고 있어서 초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카사네는 초베 국립공원과 가장 가까운 도시로, 많은 여행자들이 카사네를 베이스캠프로 삼으며 초베 국립공원에서 사파리 투어를 즐긴다. 강을 따라서 만들어진 도시인만큼 카사네의 캠핑장도 대부분 초베강을 따라서 자리 잡고 있었다. 초베 사파리의 유명세 덕분인지 카사네의 숙소는 지금까지 만난 아프리카의 숙소들 보다 호화스럽게 잘 꾸며져 있었다. 초베강의 야생 환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럭셔리 롯지들은 손님들이 마치 사냥꾼이나 탐험가가 된 듯한 착각이 들게 끔 만들어져 있어서 누구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런 고급스러운 글램핑 호텔들 틈에서 저렴한 캠핑족들이 머물만한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행히 대형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에 빈자리가 있어서 초베강의 석양을 볼 수 있는 멋진 곳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여느 호텔과는 사뭇 분위기 다른 아프리카의 리조트
아침에 텐트 밖으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 잠을 깼다. '와장창'. 살림살이가 엎어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텐트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부지런한 원숭이 무리들이 캠핑장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어찌나 재빠른지 돌팔매질로 맞추는 것도 어림없었다. 지난 캠핑의 경험으로 음식 종류는 자동차 트렁크에 안전하게 보관했기에 원숭이들의 표적이 될 일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리한 동물은 기여코 먹을 것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애써 만들어 놓은 간이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 달콤한 냄새가 나는 비누 하나를 물고 달아났다. 간신히 원숭이들을 쫓아 보내고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킁킁' 소리와 함께 멧돼지 무리가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멧돼지를 생각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을 쳤는데, 이곳에서 멧돼지들은 영화 '라이온 킹'의 품바와 같이 친근한 동물이었다. 동네 마트에도 경찰서 주차장에도 놀이터 그늘에도 어디서나 품바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사파리의 도시 카사네는 도시 전체가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었다. 어떤 때는 동물들이 사람을 상대로 사파리 관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사네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깜짝 놀란 사이에 결국 아침밥을 약탈당했다.
카사네에 왔으니 우리도 초베 사파리 투어를 하러 나섰다. 초베 국립공원의 사파리 투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륜 구동차를 타고 동물들을 직접 찾아다니는 게임 드라이브, 다른 하나는 초베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하며 물을 마시러 온 동물을 관찰하는 리버 크루즈다. 게임 드라이브는 이미 에토샤 국립공원에서 경험했기에 이번에는 배를 타고 동물들을 만나는 리버 크루즈를 선택했다. 예약 시간에 맞춰서 선착장으로 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카메라와 쌍안경을 들고 상기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수영하는 하마 무리를 보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드디어 배에 올라탈 시간이 되었다. 리버 사파리를 위한 배는 넓고 평평한 갑판에 자유롭게 앉아서 동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있고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천막으로 지붕이 덮여있었다. 그리고 동물들을 좀 더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도록 2층 전망대도 마련되어 있어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카메라를 거치할 수 있는 장치가 준비되어 있는 보트도 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나 초베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강물 속에서 언제 갑자기 악어나 하마가 머리를 내밀지 몰라서 약간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강가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에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배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야생 동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토샤 국립공원에서는 동물들이 모이는 물웅덩이를 찾아다녔었는데, 초베에서는 동물들이 모여드는 강가를 따라 이동하며 관찰을 할 수 있어서 편하게 다양한 동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강가로 내려온 스프링복 가족이 물을 마시고 악어 형님은 눈을 감고 반신욕을 하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강에 사는 물고기를 먹기 위해 모인 새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보호색 때문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그러던 중에 눈앞에 거대한 동물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코끼리 무리였다. 초베 국립공원은 물이 풍부한 덕분인지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코끼리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을 마시러 강을 찾아왔구나 생각하는 순간 코끼리 한 마리가 첨벙첨벙 물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거대한 몸으로 마치 물속을 걷듯이 수영을 하면서 강 한가운데 있는 수초를 뜯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코끼리 점보만큼이나 놀라운 수영하는 코끼리의 모습을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여유롭게 수영하며 수초를 뜯는 코끼리. 아마 물아래의 발은 무척 바쁘겠지.
배는 다시 수초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강 상류를 향해 느릿느릿 이동했다. 평화로운 강가 풍경에 취해있을 무렵 멀리 강물 위로 동글동글한 머리들이 잔뜩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배 위의 사람들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배가 가까이 가자 물에 눈과 코만 내밀고 모여있는 하마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고 검은 눈의 순해 보이는 초식 동물의 외모 때문일까? 흉폭하기로 유명한 하마가 십여 마리가 모여 있는데도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때에 하마 무리 중의 두 마리가 다투기 시작했다. 거대한 입을 벌리자 무시무시한 엄니가 보였다. 그제야 맹수의 위엄이 느껴졌다. 혹시라도 배로 달려들어 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하마 무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달려올 것 같아서 눈을 내리깔고 숨을 죽이고 그들을 관찰했다. 나도 모르게 배의 기둥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크게 하품하는 하마의 모습을 찍고 싶었는데 매번 놓쳤다.
배는 하마 무리를 멀리 돌아 다시 출발했던 선착장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강가로 밤이 되기 전에 목을 축이려는 동물들이 분주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느긋하게 앉아서 보며 흘러갔다. 출발할 때만 해도 짙푸른 빛깔이었던 강물이 어느새 황금빛으로 변해있었다. 지평선의 끝자락에 해가 내려앉자 사방은 오렌지 빛으로 가득했다. 커다란 황금의 방에 들어앉은 기분에 취해 몽롱한 기분으로 2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겨우 2미터 남짓 올라간 정도였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시야가 확 넓어진 느낌이었다. 황금빛 세상을 바라보며 금빛 강을 유유히 흘러가는 경험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손톱만큼 남아서 마지막까지 빛을 뿜어내던 해가 끝내 사라져 버리자 몹시 아쉬웠다. 이런 장엄한 축제가 매일 열린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자연이다.
초베강의 일몰은 사방을 금빛 궁전으로 만들었다.
황홀감에 취해서 배에서 내리자 갑자기 현실이 다가왔다. 야생의 밤이 온 것이다. 우리가 묵었던 캠핑장은 리조트에서 약간 떨어져 초베 국립공원의 경계에 붙어있는 곳으로 야생 동물들을 위해서 인지 조명이 거의 없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텐트를 찾아가긴 했는데 이제부터 저녁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시내로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기에는 번거롭고 리조트에 있는 레스토랑을 이용하자니 지출이 커지게 될 것 같아서 결국 작은 렌턴을 머리 위에 달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해가 지고 사방이 조용해지자 낮에는 들리지 않았던 동물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캠핑장 곳곳에 '악어 주의', '하마 주의' 등의 문구가 보여서 심란했는데 음식 냄새를 맡고 아침에 봤던 품바들이 달려들지는 않을까 바짝 긴장한 채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요리를 해서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다음 미션은 샤워. 어스름한 달빛을 조명 삼아 찾아간 샤워장은 하늘이 열려있어 놀랍도록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었다. 샤워하는 내내 마치 밀림 속에서 몰래 목욕을 하는 기분이었다. 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까치발로 돌아와 텐트 안에 눕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내와 나란히 침낭에 들어가서 멀리서 들려오는 동물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했다. 어둠이 가득한 텐트의 얇은 천 너머로 자연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