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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mini Oct 16. 2020

미국 이민 가정의 장녀, 나의 숙명

내가 서른이 되어보니

밤 12시,

피닉스 본가에 와있는 나와 산호세에 있는 남자 친구가 페이스타임을 하는 시간이다.


그가 하루 종일 휘몰아치는 업무에 치이다가 겨우 차분히 앉아 나와 하루의 일과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간.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피닉스 본가의 키친 리모델링과 가전제품 교체를 진행하며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던 참이었다.


"나 오늘 힘들어 죽는 줄 알았잖아.. 휴대폰만 몇 시간씩 붙잡고 전화를 몇 통을 한 건지, 진짜 스트레스받아.. 일이 왜 이리 착착 진행이 안 되는 건지."


그가 조금은 의아한 듯 묻는다,

"힘들었겠다, 그런데 부모님이 take lead 하셔서 하는 거 아니야?"


사실 이 질문은 미국에 살며 여러 사람으로부터 몇 번이고 들어온 질문이었다.


맞다, 한국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여전히 독립하지 않고 부모님 소유의 집에서 살고 있었을 테고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부모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다. 모든 결정을 부모님이 주체가 되어 내렸을 것이고 어쩌면 나의 의견은 최소한으로 개입이 되었을 것이다. 공사를 진행하며 원하고 원치 않는 방향을 엄마 아빠 스스로가 거리낌 없이 업체 측에 적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일이 꼬이고 업체 측에서 잘못을 하면 클라이언트로서 불만도 토로하고 보상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미국이니까.

한국어가 제1의 언어가 아닌 곳이니까, 특히나 우린 여기서 주류가 아니니까.

엄마 아빠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느 때와 같이 대답한다,

"오빠.. 이게 이민자 가정의 장녀들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고충이야. 이게 우리의 숙명이야."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미국 이민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식은 참석하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아서 왔다.

그게 2005년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경험이 없다.

수능 공부를 해 본 적도 없고 야자를 해 본 기억도 없다. 쉬는 시간에 종이 울리자마자 매점으로 뛰어가서 주전부리를 사 본 경험도 없다.

한국에선 분당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땐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엄마 아빠가 없이 서울에 간 건 이민 오기 바로 며칠 전, 엄마의 권유로 홍대 쪽에 가 본 게 다였다.

(그 날 한 카페에서 성시경을 봤다. 어린 맘에 서울에 오면 연예인도 보는구나 생각했다.)

요즘 중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라떼는 말이야.." 그냥 떠먹여 주는 밥을 먹고 방과 후엔 줄지어져 있는 학원 스케줄을 소화하고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나가 줄넘기를 하면 하루가 끝났다.

그때의 나는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였다는 말이다.


그런 어린애가 엄마 아빠보다 아주 미미하게 나은 영어 실력을 가지고 이민을 왔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집안 대소사의 일처리, 그 중심엔 항상 내가 있었다. 승무원이 된 후 다른 도시로 이사 가게 되어 독립하기 전까진 거의 모든 전화업무는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앞세움 "당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나는 문제의 자초지종도 모른 채 엄마 아빠가 전하는 말에만 의지한 채 전화기를 붙잡고 통역해야 했다. 엄마 아빠가 "이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전화를 해야 해"라고 한 말에 보험 회사, 병원, 통신사, 카드사 등으로 전화를 걸면 문제에 봉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는 너무 어렸기에 일의 상관관계, 이해관계들의 조각을 맞추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정확히 무슨 문제가 있어 전화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시점에서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통화를 끊고 나면 엄마 아빠는 "그게 아니라 이렇게 더 말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늘 찝찝해했다.


독립한 후 난 암묵적인 약속처럼 한 달에 한 번씩은 피닉스 본가에 왔고 그때마다 엄마는 "어, 맞다! 여기에 전화해줘야 해"라고 기다리기도 한 것 마냥 나에게 밀린 "전화"를 해주길 부탁했다. 미국에서 사회생활을 하기 전엔 그런 행정적인 전화를 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독립을 하며 내 일처리를 내가 나서서 하다 보니, 그리고 머리꼭지가 크고 나니 그깟 전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성가시긴 해도 예전처럼 부담의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그 성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가 이번 리모델링 건이었다.


지난 금요일, 엄마의 오랜 소원이었던 키친 리모델링과 부엌 가전제품들을 전면 교체하는 일을 진행했는데 미국 특유의 비효율적이고 느린 진행속도 때문에 애를 먹었다. Countertop (부엌 상판)을 바꾸는 일에서도 업체가 오기로 한 당일 몇 시간 지각을 해서 하루 안에 끝날 수 있던 공사가 그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수도관/배수관을 교체하러 온 인부는 현관문으로 들어올 때부터 무례함의 끝을 보이더니 심지어 작업을 마치고 간 직후에 수도관에서 물이 뚝뚝 새서 골머리를 썩었다. 구매한 가전제품들이 도착하기로 한 토요일에는 갑자기 아침 댓바람부터 배달업체에서 전화가 와서 "배달 팀 중 한 명이 병가를 내서 오늘 배달 못 간다"라며 "다른 대안은 없으니 구매처인 홈디포에 전화해봐라"라는 통보 아닌 통보를 해왔다. 정말 모든 부분에서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있지? 그렇게 큰돈을 들여서 하는 공사인데 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가 있지?'싶을 정도로 내 맘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 며칠 동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불면증은 물론이고 어느 순간엔 심장이 콱 조여와서 숨을 골라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 이 성가시고 불편한 일을 엄마 아빠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가에 와 있을 때 이 공사를 진행해서 너무 다행이고 감사하다'라는 생각.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엄마 아빠가 이 모든 걸 겪어야 했다면 얼마나 속을 썩었을까, 되지도 않는 영어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다. 모든 업무처리에서 앞세움 당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하면서도 '왜 내가 해야 해? 동생도 있잖아. 난 열다섯에 미국에 왔고 동생은 열 살에 미국에 왔잖아, 쟤 영어가 더 유창하잖아. 나는 멀리 있잖아. 피닉스에 있는 동생 시켜도 되잖아'라고 속에서 불만을 갖고 툴툴대던 나였다. "대가족도 아니고 고작 넷뿐인 가정에서 뭐 이리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은지? 엄마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매달 뭐 그리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는 건지?" 의아했었는데 서른이 딱 되고 나니 내가 불만을 가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게 되었다.


한 가정을 지탱하고 유지해나가기 위해선 엄마가 갖는 궁금증들이 모두 의미 있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는 한, 매달 문제는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민가정의 특성상 그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한 땐 어린애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어른이 되어있는 장녀뿐이었던 것이다.


"자녀의 부모화 (parentification)"라는 말이 있다.

"아이가 부모나 형제들에게 부모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된 역할 역전(role reverse)을 말한다. 부모화 유형은 기술상에서 도구적 부모화(instrumental parentification)와 정서적 부모화(emotional parentification) 두 가지로 구분된다. 도구적 부모화는 가족의 물리적 과업을 완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 보통은 부모가 하는 것이 정상인 아픈 친척 돌보기, 비용 지불하기, 어린 동생들 돌보기 등을 한다. 정서적 부모화는 어린 자녀나 사춘기 자녀가 부모나 가족 구성원의 친구나 중재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 발생한다." (위키백과 발췌)


이민 가정의 장녀들은 부모화 되는 경우가 많다.

장녀들이 갖고 있는 뛰어난 공감 능력 때문일 터.

언어라도 자유롭다면 가려운 부분을 스스로 긁을 수 있겠지만 남의 나라에 와서 비주류로 살아가며 한국에서 누리던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처음부터 터전을 닦아나가는 건 분명 고달픈 일이다.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때 사람은 무력함과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걸 보듬어주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주춧돌이 이민 가정에선 절실하다.

그렇기에 그 어느 누구도 삼키라고 목구멍에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결국엔 스스로 입에 털어 넣게 되는 책임감이라는 쓴 약을 수많은 장녀들은 기꺼이 삼킨다.

(여기서 "장녀"라고 특정하는 건 내가 경험한 것과 만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다.)




서른이 되고 나니 내 주변 것들이 나와 함께 나이 들어있다.

우리 집 강아지는 물론이고 친구들까지도.

마냥 어리고 귀여워서 애기라고 부르던 사촌동생은 한 스타트업의 팀장이 되어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엄마 아빠는 내가 본가에 올 때마다 한층 더 나이 들어 있어서 매번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애초에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달리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면 함께 나이 먹어 가는 나의 부모가 이러나저러나 안쓰러웠을까.


문득 궁금하다.

엄마 아빠는 어리광 부리지 않고 큰 내가 안타까울까,

너무 일찍 철이 든 나한테 미안할까,

사춘기를 일찍 겪고 그 후엔 늦바람 들지 않고 열심히 살아 준 나에게 고마울까,

아님 이 모든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까.


내가 글을 쓰면 가장 먼저 달려와 글을 읽는 엄마 아빠가 이걸 보고 있다면 알아주길,

이민가정의 장녀로서의 숙명을 나는 이해한다는 걸.

한 땐 무작정 시키고 부탁하기에 해야만 해서 했던 일들, 좋은 딸로 보여지고 싶어 했던 일들이었지만 이젠 엄마 아빠가 조금이라도 마음 편한 일상을 살길 원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총대를 맨다는 걸.


엄마 아빠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무탈하고 풍족히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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