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9 작성 글입니다>
새벽 비행을 하고 있노라니 문득 고마운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삶에서 거저 주어진 것들이 많았다.
태어나보니 엄마 아빠가 내 엄마 아빠였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엔 언제나 사랑이 넘치던 그들이 있다.
우리 집은 무척 풍족했고 그것을 누리다가 미국 이민을 왔다.
많은 사람들은 꿈만 꾸는 미국 생활,
한국에선 명예로운 삶을 살던 엄마 아빠가 닭공장에서 일해야 영주권 받는 줄 알았는데 염려와는 달리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참 다행이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엄마 아빠가 닭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우린 남들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돌고 돌아 영주권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캘리포니아에 살 땐 참 적응하기 힘들 정도의 어려운 시간도 있었는데 어쨌든 눈 떠 보니 시간은 흘러있었으니까.
개그우먼 박나래 씨가 나 혼자 산다 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울며
“내가 신인 시절엔 매일 동료들에게 얻어먹을 때가 많았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내가 배고프면 밥 사주고, 술 마시고 싶으면 술을 사줬었다. 그때는 내가 돈이 없어서 보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베풀 수 있게 돼 너무 좋다”
라고 하는 말에 나도 엉엉 따라 울었다.
내 기억 속의 엄마 빠는 늘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었다. 기부를 해도 꼭 익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미국에 와 녹록지 않은 이민 생활을 하며 여기저기서 도움받는 건 많은데 돌려줄 상황이 안되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거다.
(엄마 아빠는 미국 살림이 나아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결식아동 후원이었다. 대단한 사람들)
내가 너무 어려서 뭘 몰랐을 때는 엄마 아빠의 이런 마음이 이해될 리 만무했다.
그런데 흉내만 내던 으-른에서 진짜 어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지나다 보니 이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상황이 되고 형편이 된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감사할 때가 있다.
그저 학생 그리고 후에 박봉을 받는 신입 승무원이었을 때는 가끔 친구를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대접할 형편은 안되는데 웃기게 또 얻어먹는 건 싫어서 그때 재정상황에 따라 친구를 가려 만났다.
그런데 그때도 내가 뭐 예쁘다고 꾸준히 밥 사준 친구들, 커피 사준 친구들, 뭐 하나라도 챙겨준 친구들, 화장품에 핸드로션에 이것저것 손에 쥐어주고 입에 물려준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정말 애정 하나만으로 미술 입시를 도와준 인생의 멘토와도 같은 선생님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네가 생각나서 샀어”라고 말을 하고 선물을 주는 게 익숙지 않던 내가, 나 혼자만 알던 내가, 돈이 조금 벌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버는 돈을 남한테 많이 쓰게 된 이유인 것 같다.
(물론 돈이 조금 벌린다고 말하는 지금도 샌프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룸메와 살며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ㅋㅋ)
그래서 박나래 씨의 말에 엄마 아빠가 생각이 나서 그리고 내 생각이 나서 엉엉 울었다.
너무 많은 사랑을 거저 받았다.
한국에 살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한국에 쭉 살았다면 아마 나는 목표를 상실한 한량이 되었거나,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거다)
내가 엄마 아빠가 빌리어네어여서 내가 평생 일도 안 하고 이 나라 저 나라 여행만 다닐 수 있는 기 막힌 갑부집 딸도 아니고,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다 커서 노력 없이 받아먹길 바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승무원이 된 것은 나에겐 최선이다.
그리고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일이 년 똥밭에서 구르는 것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들, 지금과 같이 될 보장만 있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할 수 있다.
비로소 더불어 살 수 있는 지금이 나에겐 너무 감사한 시간이니까.
엄마 아빠를 더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시간,
내가 가장 형편없을 때 내 옆에 있어준 사람들만 있다면 그 외에 남들이 날 어떻게 오해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개의치 않게 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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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나서 쓰는 29살의 겨울 끝자락에
철든 척 오지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