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 망할 것
아주 얄궂은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여느 때와 같이 힘차게 글을 열어본다.
2016년 10월, 첨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막 항공사에 입사해서 비행에 재미를 붙이고 아드레날린이 터져 나오는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코로나가 터지고 휴직을 한 최근 몇 달,
비행이 없으니 비행일지처럼 쓰던 블로그 글을 쓸 이유도 없어졌었다.
그렇다고 휴직 후의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해 쓰자니 요동치는 감정 기복이 그대로 알알이 드러날 것 같아서 블로그에 들어오는 것조차 꺼려졌었다.
나의 고난이 남들에게 가십거리가 되고 나의 약점이 되는 이 시대에,
그리고 모두가 힘든 이 시기에,
굳이 징징대는 글을 쏟아낼 필요는 없으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항공업계는 코로나 이후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업계 중 하나다.
거의 모든 오피스 직종들이 재택근무에 돌입하게 되면서 business travel을 하는 승객들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불필요한 여행을 삼가고, 또 그리 할 수밖에 없게끔 정부로부터 여러 업종에 대한 행정명령이 떨어졌었다.
(지금도 미국은 노답이지만) 최근, 코로나의 피해가 가장 컸던 3-4월에 비해 최근엔 탑승객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역시나 항공사가 적자를 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며,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허공에 돈을 태우며 비행기를 띄우고 있는 실정이다.
나라마다 항공사마다 생존해나가려는 전략이 다 다르지만,
우리 항공사는 상황이 나아지기 전까지 나를 포함한 수천 명의 승무원들을 10월부로 furlough (펄로/강제 휴직 개념) 시키게 될 것 같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 협상 중인 지원금이 통과가 된다면 휴직당하지 않고 적어도 몇 달 간의 시간은 벌겠지만, 그 몇 달 후에도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도 또 펄로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반복될 것이다.
모든 게 seniority (연차)가 높고 낮음으로 앞으로의 운명이 정해지는 미국의 항공업계에서 나는 애석하게도 이번 펄로 대상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게 구체화되면서 꽤 긴 시간 동안 현실 부정에 빠져있었다.
현실 직시하기를 거부하다 보니 기분이 안 좋지는 않았다.
다만 4월부터 자진 휴직을 신청하면서 비행이 없었고, 때론 심심했고, 때론 불안했고, 때론 비행을 하면 못 했을 것들 (골프, 일본어 배우기, 베이킹 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 부정을 하던 긴 시간이 지나고, 오지 않길 바라던 10월이 코 앞에 닥쳐왔다.
그리고 날 더 착잡하게 하는 건.. 앞으로 코로나가 언제 종식될지 이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해 펄로 당하는 우리가 언제 다시 복직할 수 있을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내 상태는 무기력함과 우울감으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하지만 이젠 마냥 이런 기분을 "만끽"하며 있을 수만은 없지,
지금 내 능력 밖의 "can't do"와 내가 할 수 있는 "can do"를 구분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CAN'T DO><Cant Do'
- 펄로를 피하는 것
<CAN DO>
- 펄로 당하기 전까지 비행 최대한 많이 하기
- 펄로 당하기 전에 한국 다녀오기
- 적성을 찾으면 유니언에서 제공하는 컬리지 프로그램 등록하기
- 베이킹 관련된 직업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 찾기
- 매일 골프 연습해서 스트레스 날리기
- 마지막 대안으로 (복직 전까지) 다른 직업 찾아보기
- 주치의에게 리퍼받아 내시경 예약하기
- 일희일비하지 않기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는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내가 어른으로 도약하는 데에 기반을 닦아준 일.
총 15년의 미국 생활을 하며 우물 안 개구리같이 시야가 좁아져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 주고, 나의 작고 옹졸한 세계 밖엔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준 직업.
평생 가족이 될 친구들을 엮어주고, 또 평생 가족과 같은 친구들에게 닿을 수 있게끔 자유를 준 직업.
내가 제일 힘들 때 가장 큰 위로가 됐던 게 "비행이라는 일 자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유일무이한 인생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난히 더 애착이 가는 일이었다.
어쩔 땐 하루 이틀만을 쉬어가며 한 달을 꼬박 채워 비행해도 힘든 줄도 모르고 즐기며 했던 일이기에 나보고 지금 당장 이 일에 손 떼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하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내가 이만큼 애정을 쏟게 될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신입 시절,
생존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엄마 아빠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작에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되는 만큼 정말 정말 힘들었던 그때.
그 시간을 존버 했고, 겨우 숨통이 트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인생은 다시 또 커브볼을 날린다......
나는 위기에 봉착하면 그걸 타개해나가는 능력은 분명 있는 것 같다.
그런데 10월에 과연 나는 펄로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결론 나지 않은 궁금증과.. 내가 복직할 때까지 무엇을 해야 가장 좋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은.. 분명 괴로운 시간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이 웃고, 더 움직이고, 감사할 거리를 더 찾아야겠다.
너무 그립다.
평범했던 날들이.
북적이는 카페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찾아 블로그 글을 쓰던 일이.
만석인 비행에 빼곡히 찬 자리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빈자리를 찾아 몇 자리가 비었다고 지상직원에게 일러주던 일이.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표정을 통해 그 사람들의 기분을 읽던 일이.
비행 전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비행을 하기에 앞서 에너지를 얻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너무 그립고, 이 끔찍한 모든 상황이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까 봐 두렵다 너무.
여느 때처럼 나의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다 보면 다시 비행을 할 수 있게 되겠지........ 언젠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늘아 날개야
고마웠어.
조금만 있다가 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