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nmini Oct 06. 2020

Bilingual, bye-lingual

미국 1.5세 승무원이 한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2016년 5월 첫 비행을 시작하고 10월 무렵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마 내가 비행의 장점에만 사로잡혀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는 마법의 색안경이 살짝 벗겨지며 비행의 뜨거운 맛을 느끼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첫 비행 이후 몇 개월은 정말 그랬다, 모든 게 아름다웠다. 처음 가보는 도시와 나라들, 내가 살면서 내가 내 의지로 찾아가 보지 않을 법한 곳들, 매 비행마다 바뀌는 크루. 난생처음 해보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들을 하며 나는 승무원으로의 삶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이었다. 내가 승무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지를 여실히 깨닫기 시작한 게. 인간이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건 뭐,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창문 밖을 내다보며 내 방에서의 풍경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의 낯선 풍경을 보고 있자니 외로움을 초월하여 "고독함"이라는 게 무슨 감정인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 비행마다 바뀌는 크루를 비롯하여 수많은 승객들을 만나는데 "외로울 틈이 어디 있어"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비행기 문이 닫히고 열림과 동시에 두 번 다신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밀물과 썰물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군중 속의 고독"이 얼마나 더 처절하고 쓰라린 것인지를 알게 해 줄 뿐이었다.


특히 매번 새로운 크루와 비행을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대화는 늘 한정되어 있었다. "너는 어디서 태어났니, 어디에 살고 있니, 이 일을 하기 전엔 뭘 했니, 결혼했니, 아이는 있니?" 등과 같은 신상 조사 식의 대화를 비행 섹터 개수에 따라 하루에 많게는 5-10번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서로의 나이를 물어보는 게 실례라고 여겨지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에서 저런 개인적인 사생활에 관련된 질문을 서스름없이 대놓고 할 수 있는 건 승무원의 세계가 가지는 고유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차피 한 번 비행하고 나면 언제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이 사람들과 기내에 갇혀 상대방의 성장 배경부터 요즘 뭘 먹고살고 어떻게 살을 뺐으며 언제 결혼/이혼을 했고 강아지는 몇 마리가 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질문과 답을 하다 보면, 내가 10년을 넘게 알고 온 친구보다 어쩌면 지금 내 앞에 앉은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된 이 동료가 "현재의 나"에 대해 더 많이 알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럼 뭐하는가, 지금 내가 나눈 이 모든 대화들은 우리가 착륙을 하고 비행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를 그저 "25,000여 명의 동료들 중 하나"로 만드는 무의미한 대화일 뿐인데. 문이 열리면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가거나 각자의 호텔 방 문을 걸어 잠그고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가끔 맘이 맞고 말이 통하는 동료를 만나면 조갯 속 진주를 찾아낸 것 마냥 기뻤다. 애석하게도 미국 승무원들은 대게 다른 도시 혹은 다른 주에서 통근을 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내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서 회포를 풀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지만.


각설하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집이나 호텔 방에 들어가면 늘 마음 어딘가가 공허했다. 내가 비행하며 느끼는 바를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해소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직업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술이나 파티 같은 단기적인 것들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15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 한국과 미국 두 문화가 뒤죽박죽 짬뽕이 된 나의 정서는 그래도 한국에 조금 더 가까웠다. 미국에서도 한국 신문이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이 되던 때까지는 한국 신문을 더 즐겨봤고 특히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한국의 정세에 더 크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하고 혼자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즐겨하던 내가 한국어로 글을 쓰니 내적 시너지 효과가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15살부터 써 온 영어라지만 매일 크루와 수박 겉핥기식의 대화만을 하며 생활 영어를 쓰느라 영어 실력이 향상될 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어디서 한국어를 쓰는 것도 아니니 가끔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하다 보면 단어가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생각나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분명 머릿속에 하고자 하는 말이 어렴풋이 그려지긴 하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어.. 어... 그거 있잖아, 그거"로 퉁치고 넘어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bilingual (두 나라의 언어를 하는)이 아니라 bye-lingual (언어 모두 bye bye)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블로그를 시작하고 글을 쓰며 하고 싶은 말들을 2-3일에 걸쳐 정리하고 다듬고, 쓰고 싶은 단어를 사전을 들여다보며 검색하는 과정에서 한국어를 조금 더 조리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이제 코로나 19 때문에 비행까지 쉬니 더더욱) 영어를 쓰는 빈도수는 줄어들었지만 적어도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 모두에게 "bye"라고 하며 멀어지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속에 꽁꽁 숨겨두고 곪아 터져야 열어보던 감정들을 글로 적어 표출하다 보니 조금 더 건강한 마음으로 비행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가 가져다준 긍정적인 효과를 일일이 다 형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코로나 19 때문에 하늘길이 막혀 강제 휴직을 당하며 비행을 쉬게 된 게 슬프긴 하지만 이 시간 동안 마음껏 글을 쓰고, 비행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내 가능성을 확인하고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 가슴이 뛰기도 한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내가 복직할 쯤엔 내가 흩뿌려놓은 나의 비행 일지들이, 나의 경험담들이 한 데 모여 하나의 스토리북으로 완성되어있길.

"나 쉬는 동안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노라" 말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본다.

이전 07화 삶에서 거저 주어진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