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오늘 직장과 이별했어요
초등학생 4학년의 나는 그날도 컴퓨터 학원(지금은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에서 타자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냈을 때 말이다. 내가 나간 학원 복도에는 아빠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정민아 지금 할아버지가 많이 위독하셔서 병원에 가야 해"라며 나를 조퇴시켰다. 아빠 차 안, 병원으로 가는 내내 뒷좌석에서 나는 몸을 운전석으로 기대어 "할아버지 얼마나 아파?"를 연신 물었고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 나의 첫 번째 이별은 할아버지와의 이별이었다. 어떠한 사정 때문에 어린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드디어 몇 년 만에 본 할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 영정사진 너머로만 만나볼 수 있었다. 아빠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은 어린 내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한 아빠 나름의 선의의 거짓말이었고, 그리하여 내가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병원의 병실이 아니라 장례식장이었다. TV 속 뉴스에서만 보던 "아이고, 아이고" 땅을 치는 통곡이 난무하는 장소. 어린 나는 뭣도 모르고 "아이고, 아이고"를 따라 했지만 이내 곧 사촌동생들과 식장 한 곳에 자리 잡고 투닥투닥 놀기 시작했다.
내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아빠의 독단적 판단은 옳았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두 번 다시 할아버지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슬픔"은 초등학생 4학년의 내가 훌쩍 자라 대학생 4학년쯤이 됐을 때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유난히 많은 종류의 "이별"을 하며 살아가게 될 나의 운명의 시작은.
가령 2017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 정들고 친해지고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많은 유학생 친구들은 어떻고? 그리고 전 남자 친구들과의 헤어짐 등 다양한 성격의 이별들을 맞이했다. 그 과정들을 거치며 난 친구의 우스갯소리처럼 "프로 이별러”로 거듭났나 보다.
너무 어려서 와 닿지 않았던 할아버지와의 이별 후에 직계 가족과의 이별을 하게 된 건 2017년 외할머니의 임종이 전부다. 늦은 밤 비행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생필품을 사러 급히 Target (마트)에 유니폼도 갈아입지 못하고 갔는데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가 전화할법한 시간이 아닌 늦은 밤이었기에 의아했지만 뭔 일인가 싶어 받은 수화기 너머로 엄마는 나지막이 흐느끼고 있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라며 외할머니의 타계를 전해왔다.
부끄럽게도 나는 외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외할머니는 남아선호 사상의 대표주자로 손자들에겐 부엌도 못 들어오게 하면서 손녀들은 늦은 밤에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게 시키는 야박한 사람이었으니까. 우리가 이민을 오고 몇 년 후 외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되었고 나는 '그래도 핏줄인데' 싶어 한국에 가면 종종 외할머니를 뵈러 분당에 있는 요양원에 가곤 했다. 미국에서 국제전화로 전화를 하면 늘 "아이고 미안하다.. 할머니가 차별했던 거 미안하다.. 할머니 맘은 그게 아니었는데.."라며 후회와 한탄이 섞인 사과를 건네 온 외할머니였기에 '그래도 이젠 찾아뵈면 예뻐해 주실 거야'라는 일말의 기대 같은 것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나 외할머니는 막상 내가 찾아뵈면 앞에 앉은 나는 박대하고 이모나 간병인 아주머니와의 대화만 이어갔다.
'그래.. 사람은 변하지 않지', 내가 내린 결말이었다. 그렇게 외할머니와의 관계를 끝내 풀지 못하고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미움과 원망만이 가득해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엄마의 전화에 나도 같이 울음이 터져버렸다. 아니, 사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라는 말보다 더 슬펐던 건 "나는 이제 고아가 되었어"라는 엄마의 말이었다. 아! 평생을 삼촌의 그늘에 늘 엄마는 뒷전으로 생각하던 그 남아선호 사상에 찌든 외할머니의 죽음에 엄마가 울고 있구나. 맞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지.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서운한 게 많은 엄마일지라도 엄마는 엄마구나. 그렇게 할머니를 향해있던 나의 뾰족한 마음, 원망의 화살 같은 것들 또한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훨훨 날아갔다.
나는 오늘 직장과 이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10월 1일 부로 직장으로부터 이별 "당했고" 재회 가능성은 있다지만 6년 안에 회사가 다시 불러주지 않는다면 내 직업과의 재회의 꿈은 날아가게 된다.
미국 항공사들에는 근로계약서가 존재하는데 이렇게 "강제 휴직이 불가피한 상황에 강제 휴직을 당한 날을 기준으로 6년 내에 다시 회사가 정상 운영이 가능하고 그래서 인원 충원을 하게 되면 새로운 채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휴직 중인 승무원들부터 연차 순으로 불러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되고 6년 내에도 종식되지 않아 회사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라면 나와 같은 승무원들은 정확히 6년 후 기다림의 결실을 맺지도 못하고 그냥 해고되는 것이다.
사실 직장과의 이별은 몇 달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일이기도 하다. 마치 외부적인 요인으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연인관계처럼, 그 둘은 이미 균열의 징조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되지 않는다”라고 치부해버리는 그런 관계처럼. 그러다가 막다른 길에 다 와서야 생채기만을 남기고 끝나는 관계처럼. 어쩌면 나는 미국에서 코로나가 악화되기 시작한 4월, 이 헤어짐을 예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휘청일 때마다 내 두발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준건 다름 아닌 비행이었다. 승무원 트레이닝 중 비겁한 이별을 당한 후 꽤나 속앓이를 했는데 처음 한 하와이 비행에서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와이키키 해변을 보면서 결심했다. 떠나가는 것들에 슬퍼하지 말자고.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는 세게 쥐면 쥘수록 내 손을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것들일지도 모른다고. 그 다짐이 있고 난 후 나에게 있어서 헤어짐들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그런데 난 이제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별을 맞이한다. 내게 활력이 되어주던 내 직업과의 이별. 스스로가 하는 일을 이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나 많은 이별을 감내해온 프로 이별러인 나조차도 이런 이별은 처음이다. 직장으로부터 당하는 이별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거지?
"나는 이제 백수라서 아침에 일어나도 정해진 일정이 없고 향할 직장이 없어"라는 자괴감은 무엇을 해야 극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맘을 먹었다, 인간관계에서 이별을 하는 것과 같이.
여태 비행에 발이 묶여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베이킹, 글쓰기, 골프) 마음을 쏟아보려고 한다.
혹시 모르잖아, 비행만큼이나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이 생길지.
매일 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의 다른 호텔에서 쓰러지듯 잠에 들던 내가 이젠 매일 밤을 내 방 내 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찾을지도 모르잖아.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저녁을 함께 차려먹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혹시 또 모르지, 여기저기 다니며 시차가 뒤죽박죽 되는 나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규칙적인 삶을 사는 그런 평범한 나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근데 에라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좀 우울하고 싶어.
원래 그렇잖아.
이별한 후에 "당일 딱 하루만 엉엉 울고 그다음 날이면 괜찮아진다"던 친한 언니를 신기해하던 내가 프로 이별러로 거듭났을 때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분명 이별을 애도할 시간은 필요하다.
그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다시 도전을 해 볼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주춤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를.
그래서 이 프로 이별러가 이번 이별 또한 능동적으로 잘 극복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