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더미북이 왔어요
스케치북 크기의 더미북(가제본)이 왔다. 새하얀 표지로 페이지마다 두 장의 종이가 등을 맞대고 붙어 있었다. 화려하지만 정감 가는 색감, 짧은 글귀, 많은 동물 그림들이 다양한 배경에 나왔다. 표지에 편집자의 정성스러운 엽서가 붙어있었다. “어린이편집자님께”로 시작하는 그 엽서를 진혁이에게 읽어주었다. 편지를 쓴 사람이 몇 살이냐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냐고 물었다. 자신에게 경어를 쓰며 존중해주는 것이 낯설고, 자신보다 어리기에 자신을 높여주는 거라 생각한 듯했다.
천천히 한 장 한 장 진혁이와 책을 보며, 진혁이가 하는 말을 녹취했다. 평소 책을 볼 때 우리부부는 그림을 펼쳐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읽어주고, 아이들은 조용히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런데 아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듣고 싶은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진혁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책을 보다가 말해도 좋다,라고 사전에 말을 해두었다. 그래서였을까? 한 화면을 펼쳐놓고 10분가량 아들이 떠들어댔다. 사실 책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동물들이 많이 나왔다.
만 2세가 되기 전부터 자연관찰 책을 부지런히 반복해서 봤고, 지금도 서점에 가면 동물 관련 책을 사달라고 조르는 진혁이다. 동물 관련 새로운 책을 보다가도 다른 책에서 본 동물이나 비슷한 종류의 동물이 나오면 책 읽기를 멈추고, 해당 책을 찾아와 페이지 펼쳐두고 두 책을 비교하며 보는 모습을 자주 봤다. 2권이나 3권의 책을 동시에 펼쳐놓고 나름의 방식으로 비교 분석하며, 자신이 새로이 알게 된 점이 있으면 어김없이 엄마나 아빠한테 말하곤 하던 진혁이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 동물, 식물, 곤충, 공룡에 대해 엄마 아빠보다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우리 부부에게 퀴즈를 내며 그것들의 특징을 설명해주지만, 1년 전부터는 거의 맞추지 못하고 있다.
더미북을 보며 진혁이가 많은 동물들의 이름을 말했고, 나는 대부분의 동물들을 모르고 있었다. 진혁이가 제대로 말한 건지 틀리게 말한 건지 그래서 잘 알지 못했다. 다음날 책 뒤편을 보니, 책에 등장하는 동물 이름과 서식지가 나왔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동물, 위험한 동물, 살아남기 쉽지 않은 동물, 조금 위험한 동물, 관심이 필요한 동물, 자료가 부족한 동물 총 6가지로 분류되어 세모 네모 동그라미 기호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진혁이가 이름을 말하던 잘 모르는 동물들을 찬찬히 살펴보았고, 진혁이가 이름을 말한 동물의 50%는 본인이 지어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물의 특징에 따라 이름을 지은 건데, 무지한 엄마는 그 말을 믿어버렸던 것이다. 가령, 작은 이집트 뛰는 쥐를 보고 캥거루쥐라고 말한 건데 나는 캥거루도 닮았고 쥐처럼 작기도 하니 캥거루쥐라고 하는 거구나 믿었던 것이다.
진혁이는 나일악어(crocodile, 나일악어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와 가비알 악어(Gharial, 인도악어)를 보고 Crocodile과 Alligator라고 말했다. 가비알 악어가 낯설어 Alligator(북아메리카와 중국에서 발견)라고 말한 것 같다. Alligator에 대한 말을 하다가 승강기 엘리베이터(elevator)를 엘리베이터로 이름 지은 이유는 Alligator에서 따온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잠자리 책으로 더미북을 보며 40분 넘게 떠든 정우는 힘들었는지, 중간에 책 보기를 멈추어 나머지는 내일 보겠다 했다. 그러고 3권의 책을 더 읽은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유치원에 다녀온 후, 책을 한 번 더 보며 놀았다. 책 뒤편에 “아이들이 만난 동물을 모두 찾아보아요!”를 보며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동물을 찾아보았다. 동물들이 불쌍하다, 동물들 지켜주고 싶다는 말을 하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혁이가 더미 책을 보며 했던 말들을 녹취로 들으며 타이핑해서 문서화시켰다. 그리고 담당자 메일로 보냈다. 담당자와 진혁이의 미팅에 앞서 내가 해두어야 할 일을 마무리한 것이다.
한 권의 그림책 편집 과정에 참석하는 것이 진혁이에게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 예상하였지만, 진혁이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게 되어 내게 흥미로운 일이 된 것 같다.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며 크고 있구나, 새삼 뿌듯한 기분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