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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Aug 22. 2021

루피의 변신을 응원한다

아동학자 엄마의 관점에서 본 애니메이션 1: 뽀롱뽀롱 뽀로로


루피는 뽀로로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캐릭터이다. 시즌 1에서는 5명 중 루피 한 명만 여성이었다. 동물 캐릭터들의 성별을 어떻게 아냐고? 애니메이션에서 명시적으로 누가 남자이고 누가 여자인지를 직접 얘기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캐릭터의 행동, 목소리, 에피소드의 내용 등을 근거로 해서 캐릭터의 성별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게다가 루피의 경우는 일단 핑크색이다. 펭귄 뽀로로는 남색, 악어 크롱은 연두색, 여우 에디는 주황색, 북극곰 포비는 흰 색이다. 각 동물의 원래 색을 기반으로 한 색인데 비해 루피만이 원래 비버의 색과 상관없는 핑크색이다(원래 비버의 털은 짙은 갈색이다). 아무리 봐도 

‘얘는 여자야. 알겠지?’

하고 말하는 듯 했다. 

게다가 흰색 세일러 칼라와 진분홍 타이가 달린 A라인의 핑크 원피스를 입고 있다. 귀 한 쪽에는 분홍 리본핀도 달았다. 어린이집 교사 시절, 아이들과 같이 뽀로로가 그려진 퍼즐을 하고 있노라면 여자 아이들은 

‘난 루피!’

하며 서로 루피가 되겠다고 말다툼을 벌였다. 

뽀롱뽀롱 뽀로로의 등장인물들


시즌 2에서는 패티가 추가되긴 했지만, 여전히 남성 캐릭터가 주를 이룬다. 이는 그리 놀랍지도 않다. 점차 나아지고 있지만 교과서, 그림책을 비롯하여 애니메이션에서도 남성 캐릭터가 더 자주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하던 EBS1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꼬마버스 타요’의 라니, ‘로보카 폴리’의 엠버, ‘미니 특공대’의 루시 등 여성 멤버는 다수의 남성 멤버들 가운데 겨우 한 명 정도였다. 

‘여성 캐릭터가 좀 적게 나오는게 뭐 그리 큰 문제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두 돌도 안된, 세상 모든 것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흡수하는 시기의 내 아이에게 이런 게 그냥 지나쳐 갈까? 아이는 무의식 중에 어디에서든 앞에 나서고 조명을 받는 건 남성이라고 당연히 여기게 될지 모른다. 뽀로로 에피소드들 중에 남녀 캐릭터가 비슷한 비율로 등장하는 30편을 분석했더니, 남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스토리 전개가 70% 이상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뽀로로에 나오는 몇 안되는 여성 캐릭터들 중에서도 주연 급인 루피는, 생김새 뿐 아니라 내면에서도 전형적인 여성 고정관념을 답습했다. 루피의 성격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면모 중의 하나는 참을성과 인내심이 있다는 것인데, 돌려 말하면 수동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루피의 비밀친구’ 편에서 루피는 뽀로로에게 운동을 못한다고 놀림을 받는다. 뽀로로는 눈치없이 계속 놀리고, 보는 나도 짜증이 나려는 참에 루피는

‘아~앙~앙~ 뽀로로 정말 나빠.’

하고 힘없이 이야기하며 집으로 가버린다. 뽀로로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려도 부족할 마당에, 저렇게 혼자 삭히다가 홧병이 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비슷하다. 뽀로로, 크롱, 에디는 여러 상황에서 루피를 괴롭히거나 놀리는데 루피는 적극적으로 화낸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힘없는 목소리로 

‘너희들~!!’

혹은

‘어떡하지? 앙앙~’

하고 훌쩍일 뿐이다. 그렇게 참다가 결국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하고 힘없이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 마치 여성은 남성의 괴롭힘을 받아도 그렇게 소극적으로 반응하고 순응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루피가 자주 짓는 표정. 화가 나서 눈썹과 눈꼬리는 올라가고 눈물이 맺혔지만, 부정 정서를 표출하지 않고자 강하게 입을 다문 것이 특징이다.

‘루피의 잔소리’ 편은 대놓고 루피가 잔소리꾼이라는 설정을 하고 있다. 루피는 친구들의 과격한 눈싸움에 자기가 만든 눈사람이 망가지고, 뽀로로와 크롱의 장난에 컵을 쏟고 그 컵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일을 연속으로 겪는다. 루피는 친구들이 너무 위험하게 논다며, 앞으로 미리 자기가 얘기해주겠다고 한다. 이후 루피는 사사건건 친구들이 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간섭하고, 이 잔소리를 견디지 못한 친구들은 대책을 세운다. 바로 에디가 만든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자고 한 것이다. 루피는 기차가 위험해보여 망설이지만, 천천히 가면 괜찮다는 말에 기차를 탄다. 그러나 결국 기차가 내리막길에서 위험에 처하는데, 이 때 루피는 갑자기 여전사같은 모습으로 돌변하여 기차를 직접 조종하여 눈덩이로부터 친구들을 구해낸다. 어라? 싶은 순간도 잠시, 루피는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온다. 안전하게 돌아온 후, 미안해하는 친구들에게 루피는 또다시 ‘너희들~~!!!’ 하고 부들부들 떠는데 그 뒤가 가관이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친구들을 보며 ‘많이 걱정했단 말이야.’ 라는 것이다. 이 쯤 되면 루피의 역할이 동등한 친구가 맞나 싶을 의문도 든다. 루피가 보여준 모든 행동, 즉 친구들이 위험한 행동을 못하게 잔소리를 하고, 위험에 처했을 땐 기차를 직접 조종해 친구들을 구하고, 자기를 화나게 한 친구들에게 결국 

‘다 너희를 걱정해서 한 일이었어.’

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친구가 아니라 엄마 역할 같다. 

크롱과 뽀로로가 그네를 위험하게 타는 것 같다며 잔소리하는 루피

루피의 엄마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루피는 요리를 좋아한다. 그렇다. 루피는 '요리'를 좋아한다.  또 자신의 요리를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만화 중에 루피가 차려내는 음식은 눈이 휘둥그레지게 했다. 어떨 때는 내가 집들이 때 준비했던 음식보다도 더 많은 음식을 차려냈다. 주부인 내 눈에는 

‘어른도 하기 힘든 요리를 아이가 어떻게 저만큼 할 수 있지?’

싶었다. 

루피가 만든 음식을 먹는 친구들


아이들이 보는 만화이니 모든 과정을 다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루피는 너무 쉽게 요리를 하고 친구들도 루피의 요리를 너무 당연한 듯이 받아 먹는다. 루피의 수고를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루피는 친구들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누어 준다. 샌드위치를 더 먹고 싶었던 친구들은 루피네 집을 찾아간다. 일을 마치고 앉아 책을 읽으려던 루피는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샌드위치를 만들어 준다. 친구들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먹고, 눈치없이 또 루피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결국 나중에는 루피의 마음을 알고 사과하긴 하지만, 만화 중에서 루피가 음식을 뚝딱 차려내고 친구들은 너무 당연한 듯이 그걸 먹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루피가 싸온 샌드위치를 먹는 친구들. 도대체 루피가 없을 때는 식사나 제대로 할지 의문이다.


2012년도에는 심지어 ‘요리공주 루피’라고, 루피가 요리공주로 변신해 한식을 만들어 주는 시리즈가 ebs1에서 방영된 적도 있다. 2012년, CJ가 한식 사업으로 런던에 진출한 해이다. 이러한 한류 열풍에 걸맞게 루피도 더욱 적극적으로 한식을 알리는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는 제목부터가 문제이다. 요리와 공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일단 공주는 요리를 하지 않는다.공주 취급을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엔 요리라는 가사노동을 짊어질 뿐이다. 요리공주 루피의 오프닝에서는 심지어 변신 소녀물을 연상시키는, 루피가 앞치마를 입고 변신하는 듯한 장면도 있다. 요리와 공주가 어울리지 않듯, 화려하게 변신했는데 결국 앞치마와 요리사 모자 차림으로 푸근하게 웃는 루피의 모습에 김이 빠진다. 유튜브에는 뽀로로 완구를 활용한 ‘요리왕 루피’라는 채널이 있는데 적어도 이런 타이틀을 주어야 했다. 게다가 에디의 별명은 똑똑박사 아닌가. 뽀로로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똑똑박사 에디' 편이 방영된 적도 있었다. 그러니 더욱, 루피도 요리박사 정도로 불러 주어야 걸맞는 예우가 아닐까?  손끝에 물도 묻히지 않는 공주에게 요리라는 수식어를 붙이다니,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봐도 낯설게 여겨졌다.

똑똑박사 에디와 요리공주 루피.

그런 줄로만 알았던 루피인데, 의외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2020년, 뽀로로 배급사인 아이코닉스에서는 ‘잔망 루피’ 공식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잔망루피? 잔망스럽다는 단어는 태도나 행동이 자질구레하고 가벼운 데가 있다‘, ’얄밉도록 맹랑한 데가 있다‘ 라는 의미이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본 루피의 답답하고 수동적인 모습과는 정반대가 된다. 잔망 루피의 대표적인 이미지로는 눈꼬리와 입꼬리가 과하게 올라간 채로 미소짓는 얼굴이 있다. 그 외에도 티비 화면에서 본 루피의 모습과는 다른, 터프하고 성깔 있는 모습이 잔망루피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잔망루피의 대표 이미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일명 '루피 군싹(군침이 싹)'

정말로 루피는 화면 바깥에서 그런 반전의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도 주변에서 그런 친구들을 보지 않았는가? 첫 인상은 내성적이고 답답해보이지만, 친해지고 보니 거침없는 반전의 매력을 지닌 친구 말이다. 

잔망 루피는 특히 MZ 세대 즉 1980년대 초~2000년대 초의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의 Z세대를 통칭한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Z세대는 어릴 때 뽀로로를 직접 보고 자란 세대이다. 이들도 어릴 때에는 루피가 얌전하고 요리만 하는 줄 알았지만, 점차 커가면서 그런 이미지에 한계를 느끼지 않았을까? 이들은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비자들부터 시작한 변화는, 결국 아이코닉스에서 잔망 루피의 공식 계정을 운영할 정도로 영향력을 지녔다. 잔망 루피의 캐릭터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많은 인기를 얻어 굿즈를 출시할 정도에 이르렀다. 해당 크라우드 펀딩의 소개 페이지를 보면 잔망 루피에 대해 ‘더 이상 뽀로로의 친구가 아닌 당당한 주인공으로!’ ‘출구 없는 매력 부자’ 라고 소개한다. ‘출구 없는 매력 부자’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 아무리 만화라고 해도 늘 같은 면만 보여주는 친구는 재미가 없지.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아무리 요리를 좋아하고 상냥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보면, 뽀로로에서 루피를 보며 느끼는 답답한 기분은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뽀로로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자연스레 잔망루피에 열광한다. 내 아이도 무심코 뽀로로에서 느꼈을 성차별적인 요소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 하지만, 결국엔 그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면을 직접 발견하고 싶어할 것이다. 


십여 년 전, 보육실에서 나와 같이 뽀로로 퍼즐을 맞추며 

‘나는 루피!’ 

‘내가 루피 할거야.’

하고 다투던 아이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20대 전후일 이들은 이젠 잔망루피 굿즈를 사고, 잔망루피 이모티콘을 보내고 있을 지 모른다. 루피가 앞으로도 더욱 ‘출구 없는 매력’을 보여주길 기대하고, 우리 아이들이 그런 변신을 적극적으로 이루어낼 것이라 기대한다.      


참고문헌

김명희 (2009). TV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성차 연구. 세종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이미경(2021. 7. 24). "표정 음흉하네"…MZ세대들 푹 빠진 뽀로로 친구 '루피'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10723386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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