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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과 공정 사이에서

우리 교육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by JM Lee

“파시즘과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마음속에 내재한 ‘태도’에서 결정됩니다.”
이 문장을 떠올리며, 한국 교육이 과연 어떤 ‘태도’를 길러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등수를 매기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수만이 ‘엘리트’로 인정받는 우리의 교육은 정말 파시즘적 구조를 닮아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런 경쟁 체계를 경험하고도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청년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1. 경쟁 교육, 정말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걸까요?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님은 한국의 초·중·고 교육이 사실상 ‘경쟁–우열–지배’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매일 시험 점수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체제는, 은연중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논리를 학습하게 만듭니다.” – 김누리 교수


김 교수님은 이러한 구조를 ‘후기 파시즘’이라고 표현합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 제도 안에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도 안에서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서울대·의대·법대 출신 등 주류 엘리트층일수록 경쟁과 우월성에 익숙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십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곧 ‘경쟁 중심 구조에 오래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이 주장은 다소 파격적으로 들리지만, 되돌아보면 분명 생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경쟁–우열–지배’라는 틀이 평등과 존엄, 연대의 가치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서울교육대학교 권정민 교수님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하십니다. 한국 교육을 곧바로 파시즘적 구조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주입식·경쟁 교육을 받고 자란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 권정민 교수


권 교수님은 오히려 우리 교육이 강조해 온 ‘공정성’이 사회에 대한 분노나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토대가 될 수도 있다고 보십니다. ‘불공정’에 대한 민감성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민주적 자산이 될 수 있으며, 경쟁을 통한 경험이 꼭 권위주의로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십니다.



3. 무엇을(What) vs. 어떻게(How): 미래 교육의 두 갈래 과제


블룸의 교육목표 분류에 따르면, 한국 교육은 ‘무엇을 기억하고 외울 것인가(What)’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험의 정답이 분명해야 등수를 공정하게 매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 시민의 태도는 ‘어떻게 사고하고 소통할 것인가(How)’를 배우는 과정에서 길러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어떻게’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이 손이 많이 가고, 시간과 예산도 많이 든다는 점입니다. 개별 학생의 특성을 고려한 토론 수업이나 프로젝트 중심 수업은 현실적으로 초·중등 교육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권 교수님은 대학 이후 교육에서 이러한 방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초·중등에서는 기본기와 공정성을 중심에 두되, 대학에서는 자율성과 민주적 학습 문화를 적극적으로 확산해야 한다는 방향입니다.



4. 경쟁은 늘 나쁜 것일까요?


경쟁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적절한 경쟁은 학습 동기를 자극하고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서열화는 인간관계를 우열의 프레임으로 고착화시킬 위험도 존재합니다.


공정성 역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를 통해 공정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이지만, 동시에 창의성과 다양성을 제한할 수 있는 요인도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불공정하다’는 목소리를 가장 먼저 내는 세대가, 바로 이 정답 중심 교육을 받아온 청년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5. 학교, 대학, 사회의 역할 그리고 평생 학습


이제는 초·중등 교육에서 어느 정도 경쟁과 공정성의 균형을 맞추고, 대학 이후에는 민주적 토론과 비판적 사고를 심화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초·중등 교육에서는 등수 매기기나 우열반 편성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프로젝트 수업이나 학생 자치 활동 같은 민주적 체험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 교육은 교수자가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에서 나아가, 학생들이 어떻게 협업하고 스스로 배워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회에 나선 이후에도 평생 학습 문화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이나 가정 안에서도 자기성찰과 새로운 배움이 지속되어야 진정한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며: 교육은 결국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김누리 교수님의 비판과 권정민 교수님의 반론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결국 같은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교육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닙니다.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경쟁이냐 공정성이냐, 창의력이냐 정답 중심 교육이냐. 이처럼 단순한 이분법보다는,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함께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육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우리는 경쟁과 협력, 공정성과 창의성이 공존하는 교육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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