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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언어를 배운다는 것

by JM Lee

1994년 가을, 나는 카투사로 입대해 미군 기갑부대에 배치되었다. 훈련에 나가면 탱크 안에서 3박 4일을 보내야 했고, 그 좁은 공간에서 미국인 장병 세 명과 함께 생활하며 오로지 영어로만 소통해야 했다. 탱크에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 커맨더, 거너, 드라이버, 로더. 그 안에서 상황을 공유하고 명령을 내리고 농담을 주고받는 모든 순간은 영어였다. 훈련이 끝날 무렵, 나는 놀랄 만큼 영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전까지는 문법을 따지고, 번역하며 말하던 내가, 어느새 영어를 "느끼고" 있었다.


이 경험은 내가 외국어 학습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명확히 해주었다. 언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뇌 전체로 익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



언어 습득의 뇌과학적 원리


인간의 뇌는 언어에 특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좌반구의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은 각각 언어의 문법과 의미를 담당하며, 생후 몇 년 안에 이 영역들이 활성화된다. 이 시기를 "비판적 시기(Critical Period)"라고 부르는데, 이때 언어 자극이 부족하면 언어 능력의 형성 자체가 지체된다.


우리는 이 시기를 지나면서 모국어에 특화된 신경 회로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언어적 고착화"를 의미한다. 이후 외국어를 배울 때는 이 고착화된 모국어 체계 위에 새로운 언어를 얹어야 하므로, 모국어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모국어 간섭과 외국어 학습의 장벽


한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 중 상당수는 "모국어 간섭(Language Transfer)"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는 영어의 /f/ 발음이 없어, 이를 /p/로 대체하기 쉽다. 영어의 시제나 관사 개념 또한 한국어에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문장 구조도 크게 다르다. “I bought a book yesterday.”는 한국어로는 "나는 어제 책을 샀다"가 되어, 순서와 강조점이 달라진다.


이러한 간섭은 단순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뇌 속의 언어 처리 체계가 모국어에 맞춰 굳어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어휘 암기나 문법 학습이 아니라, 뇌의 회로를 새롭게 연결하는 일이다.



효율적인 언어 학습 전략


내가 영어 실력이 급격히 향상되었던 또 다른 경험은 2010년, 스페인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전공서적, 논문, 과제, 프레젠테이션을 모두 영어로 수행해야 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수백 페이지의 영어 자료를 읽고, 밤새 리포트를 쓰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나는 단순한 어휘력이 아니라, 영어로 사고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문화, 세계관을 따라가려는 노력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뉴스를 꾸준히 시청하고, 그들이 만든 드라마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일상 감각에 스며들려 했다. 세계사와 유럽사, 미국사 공부는 언어가 맥락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언어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추천한다:

몰입형 학습(Immersion): 가능한 한 목표 언어만 사용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다양한 입력과 출력의 균형: 듣고 읽는 것뿐 아니라 말하고 쓰는 연습을 병행한다.
오류 교정과 피드백: 잘못된 표현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문화적 맥락 이해: 언어는 문화의 일부이므로,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언어도 제대로 익힐 수 없다.



언어는 세계관을 배우는 일


많은 이들이 외국어를 "기술(skill)"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세계관"을 익히는 과정에 가깝다. 언어는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아니라, 그 민족과 사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산물이다.


따라서 언어를 잘 배우고 싶다면, 단어와 문법을 넘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맥락을 알게 되면, 외국어는 더 이상 낯설고 딱딱한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사고의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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