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거나 변하거나
가끔씩 대청소를 해야만 하는 날이 있다. 이때 끌어안고 사는 어떤 꾸러미들을 꼭 발견하는데, 청소를 맘먹은 당찬 초심을 외면한 채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꼭 하나하나 펼쳐보곤 한다. 특히 나의 초등학생 시절 일기장은 지나칠 수 없는 먹잇감이다. 어른이 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꼬마아이를 마주친 순간,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도 변하지 않거나 변해버린 나의 면들을 함께 맞닥뜨린다.
제목 : 김밥놀이
내용 : 예진이와 함께 김밥놀이를 했다. 이불로 돌돌 말아서 침대로 던기기.(내가 했음) 재미는... 있었다.(아주아주 솔직히 말하면 재미 엄청 없음...) 예진이는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일기 거리를 찾기 위해 그런 것이다. 파핫핫핫~
나와 6살 터울인 동생 예진과 함께한 아무도 즐겁지 않은 김밥 놀이. 이 일기는 어느 대청소날에 찍어뒀던 사진이다. 현재의 내가 뭐라도 좀 쓸 거리가 있나 갤러리를 뒤적거리다가, 초등학생의 내가 일기 거리를 찾는 하루를 찾아낸 것이다. 우와! 이때가 대략 초등학교 3학년보다 더 어렸던 때 같은데, 그렇다면 동생은 최대 4살이다.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억지로 일기를 쓰려던 꼬마가 옆에서 귀찮게 들러붙는 애기를 활용하여 꾸역꾸역 만들어낸 어떤 하루의 장면. 정말이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으슬으슬 소름이 끼쳤다.
제목 : 용돈 기입장
내용 : 일요일에 아빠께서 용돈 기입장을 사주셨었다. 그래서 돈 쓴 것마다 다~ 적으라고도 하셨다. 오들도 썼다. 오늘 너무 많이 쓴 것 같다. 아빠가 절약해서 쓰라고 (적으면서) 사주신 것이다. 그렇게는 아니지만 (오늘 쓴 돈) 좀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절약해야겠다. 그런데.. 나는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사는 사람인데...
최근 큰 필요도 없으면서 굳이 사고 싶다고 징징거리다가 산 다이슨 에어랩이 떠올랐다. 기존의 에어랩 1세대가 있어서, 정말 '굳이' 산 물건이다. 옛날과 다른 점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엄마, 아빠가 아닌 '나'라는 점이다.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되물어야 한다. 정말 이게 필요해? 왜? 이게 너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나 역시 웬만한 태클에 아주 잘 받아친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나 자신이 나의 심금을 울리며 구매하게끔 유도한다. 나 요새 정말 열심히 했잖아! 이 정도의 보상은 있어야 인생의 재미가 있는 거 아니야? 새로운 마음으로 매일 밤마다 이걸로 머리를 말리며 더 찬란한 미래를 꿈꾸는 너를 그려봐!
제목 : 인형
내용 : 내가 좋아하는 마네킹같이 조금 큰 사람인형이 있는데 오랜만에 옷도 바꿔주고 머리도 묶어주었다. 맨날 신경질 날 때 머리 붙잡고 때려서 맘에 걸렸는데... 내일은 목욕도 시켜줄 거다.
현재의 나의 스트레스 관리법은 다음과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유롭게 동네 산책을 하고,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정주행 하는 등등. 널리 알려진 아주 뻔하고 재밌고 행복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던 내가 인형에게 하던 화풀이를 나 자신에게 할 때도 있다. 앞장서서 나에 대한 모진 말을 내뱉으며 고개도 들지 못하게 못살게 군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다. 내가 아껴주고 사랑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가 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가장 싫은 무언가가 내가 되기도 한다. 다정한 미소로 나를 돌보며 나와 함께 세상에 던져진 삶을 살아내는 것, 생각보다 매우 난이도가 높지만 꼬옥 해내야 할 나의 온리원 미션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