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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엔 연습이 없다

제자와의 밤수다

by 가히

감기약을 먹고 누워 잠이 막 들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제자 A의 이름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받아 들며 나도 모르게 나오는 말


" 아가, 잘 지냈어!"


잠깐 침묵이 흐른 뒤 흐느끼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흔든다.


두 아들을 키우며 습관처럼 불렀던 아가란 호칭이 나도 모르게 나온 것은 힘든 시간 보내고 있을 제자를 향한 엄마 같은 안타까움과 애틋함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그녀의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고 슬픔에 빠져있을 제자를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한참을 울던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밖에 울면서 얘기할 어른이 없어요. 모두들 제게 잘 버티라고 얘기하니까 참게 되고...."


"그래 잘했어. 울고 싶으면 맘 놓고 울어야지."


가만히 다독이며 제자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위로도 있겠지만 그저 그녀의 아픔을 나눌 수 있길 바랐다.


고속도로를 운전하던 아빠가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켰고 간신히 휴게소까지 운전해 들어간 후 쓰러졌다는 그녀의 아빠. 옆자리의 엄마를 끝까지 지키려 한 것 같다며 제자는 다시 울먹였다. 사고 이후 의식이 없는 상태로 한 달 여가 지났고 자신이 다니는 의대부속병원으로 아빠를 모셔온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담담히 설명했다. 그리고 내게 물으며 말했다.


" 선생님 그래도 다행인 거죠?제가 아빠를 이렇게 돌보려고 의대에 간 것 같아요. 또 휴학 중인 지금 아빠를 간호할 수 있으니 말이에요!"


7살 초롱초롱한 모습의 A를 처음 만나 16이 되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르치는 내내 그녀는 늘 밝고 긍정적인 '달려라 하니'같은 씩씩한 소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로 카톡으로 궁금한 질문을 쏟아내며 가르친 보람을 느끼게 하던 제자였다. 대학에 들어간 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용돈을 벌자마자 내게 한턱 쏘겠다며 달려온 A는 어느새 다 자란 어른이 되어 세상얘기와 삶에 대해 마음을 나누었고 우리는 오래된 친구 같다며 깔깔대기도 했다.


"그래도 저는 아빠에게 좋은 딸이었어요. 아빠와 자주 대화하며 마음을 이해하는 효녀였으니까 아빠도 서운함 없으시겠죠!"


자신의 나이 20대 언저리에 사랑하는 아빠를 보내야 하는 그녀지만 여전히 어린 딸의 감정으로 아빠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 며칠 전 아빠의 연명치료를 중단했다며 이어지는 말 뒤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희 아빠가 계속 버티고 계세요. 얼마나 안타까우셔서 그러신 지. 제가 잘한 결정인지... "


한참을 우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2년 전 그때 연명치료를 하기로 했던 결정에 수백 번의 후회가 넘쳤던 나의 지난 과거가 똑같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부모를 위한 자식의 결정은 어떡해도 후회가 남는 것이고 그 자식의 마음을 부모는 무조건 이해할 거라 믿는다. 아빠도 네 마음을 이미 다 아실 거야"


60의 스승과 20의 제자가 부모를 보내며 갖는 마음이 다를 수 없을 것이다. A는 혼자될 엄마와 꿋꿋하게 버티자며 밥도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짐처럼 내게 덧붙인다.


"아 그래서요 선생님. 이번에 깨달았어요. 결혼하면 아이는 꼭 낳으려고요. 둘은 낳아야겠어요."


몇 번의 울음 뒤에 어느새 밝아진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그저 혼자 생각했다.


'짜식! 어떻게 알았지. 세상 힘든 일 자식과 나눌 때 최고의 위로가 된다는 진리를!'


살아서도 떠나서도 자식밖에 모르는 존재인 부모를 말하며 나는 엄마 같은 스승이 되었다 친구 같은 교사가 되며 제자와 함께 밤 새 슬픈 수다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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