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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은 어디에

"그럼 안됩니다 ~~, "

by 가히


' 건물 내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주민들께서는 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에~엥~~'


잠결에 들리는 화재경보에 놀라 일어난 시각은 새벽 5시였다. 여름휴가차 내려온 아들은 벌써 일어나 남편과 나에게 대피해야 한다며 서두르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아파트 화재경보 오작동된 적이 있던 터라 우리 부부는 "좀 기다려보자"했지만 아들은 화를 내며 "빨리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화재사이렌은 미친 듯이 울려대며 대피 안내 소리와 함께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반바지에 셔츠를 잠옷 위에 걸치고 차키를 챙겨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현관으로 나왔다.


현관문은 문단속에 철저한 남편이 도어록을 잠겨놓아 바로 열리지 않았다. 서둘러 나가려던 우리는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며 재난영화 주인공들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몇 번을 시도한 끝에 겨우 열린 현관문을 열자 문 밖의 경보 사이렌소리로 귀청이 떨어질 듯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는 남편에게 아들은 비상계단 문을 열며

" 아빠, 여기로 가야지"를 외쳤고 그런 아들 뒤를 보며 생각했다.

'이게 뭔 일이야, 도대체 이 새벽에!'


그때 앞집 현관문이 열리며 고개만 내민 아저씨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저 눈만 마주친 채 앞서가는 아들과 남편 뒤를따라 비상계단을 급하게 내려갔다.


생각해 보니 10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의 비상계단을 이용한 건 처음이었다. 앞서서 휴대폰 플래시를 비치며 급히 내려가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비상통로를 사용할 일이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때였다. 아들의 휴대폰을 본 순간 생각이 났다.


" 어머, 아들! 엄마 휴대폰을 안 가져왔어!"

" 그래? 그럼 어떡하지.."


나와 남편의 대화가 이어지자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아들이 소리치듯 말했다.


"엄마, 이 상황에 무슨 휴대폰이야! 조심하며 잘 내려오기나 하세요!"


혼내듯 말하는 아들 뒤에서 입을 다물고 내려가는 나는 영낙없이 대피훈련하는 초등생이었다. 유치부와 초등부 원생들을 위해 매년 실시했던 소방 대피훈련에 원장으로 참가하며 훈련조교들과 지도교육만 20여 년 했단 사실을 누가 믿을까 싶었다.


우리 가족 세 사람의 뒤를 이어 내려오는 주민의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16층인 우리 집에서 1층까지가 한참이었겠지만 휴대폰 대화 때문이었는지 긴장 백배의 두근거림이 이유였는지 어느새 1층 아파트 입구 문이 보였다. 1층 로비를 나오자 경비아저씨가 상황을 확인하느라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었다.


새벽에 비상 탈출하듯이 내려온 우리 가족의 생각과는 달리 아파트 밖은 여느 때와 같이 새소리에 7월의 아침공기가 선선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더구나 대피해 내려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더 놀랍기만 했다. 마침 우리 동 앞 지상에 주차해 놓은 차가 눈에 띄어 차 문을 열자 아들이 한마디 한다.


"엄마 그 와중에 차키는 가져왔네"

" 당연하지!! ㅎㅎ"


차 속에 앉자 마음이 좀 안정이 되었고 로비 쪽을 보니 좀 전에 아파트 문을 열고 바라보던 옆집 아저씨가 초등학생 두 아들과 함께 나오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동안에도 화재경보와 사이렌 소리가 건물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아파트 화재경보가 울리면 관련 기관들과 연결되어서 바로 소방차랑 경찰차가 올 거야. 그럼 상황이 해결될 거니까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면 돼요"


아들의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집으로 올라가고 싶었던 터였다.

이때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119구급차가 우리 동 건물로 들어서고 뒤따라 큰 소방차 두대가 들어오는 모습에 마음이 얼마나 놓였는지 몰랐다.

바로 뒤에 경찰차까지 들어오자 나는 '대한민국만세'라고 외치고 싶었다.


소방차 주차구역에 주차한 차들 때문에 소방차는 조심조심 들어오며 간신히 주차를 했고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방관님, 그냥 차 밀어버리고 주차하세요'


힘들게 주차한 소방차에서는 특수방화복과 헬멧에 온갖 도구들을 갖춘 복장의 소방관들이 줄을 지어 내리고 있었다. 이 날씨에 얼마나 덥고 힘들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일사불란하게 건물 외관을 살피며 안쪽으로 다가서는 소방관들의 모습에 나는 박수가 절로 나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내려온 소방관들 중 한 분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었나요?"

" 화재경보 오작동으로 인한 상황이었습니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 아~네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은 진심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안심하며 집으로 올라왔다.


" 엄마 이 아파트 사람들 진짜 이상해요.

이 정도로 경보가 계속 울리면 동 전체 사람들이 대피해야 하는데 ᆢ"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던 아들은 우리 아파트 주민들의 무심함이 이해가 안 된다며 말을 이어갔다.


" 엄마, 아빠, 다음에 내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겨도 꼭 오늘처럼 해야 해요. 알겠지!!"


다짐을 받듯이 강조하는 아들에게 남편이 대답했다.


"그럼,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근데 앞으로 아파트 사람들이 양들의 양치기가 될 것 같다 "


평소에도 말 안 되는 표현으로 주변을 머쓱하게 하던 남편은 이런 상황에도 자신의 심정을 난데없이 표출한다.


" 아빠, 양치기는 누구고 양들은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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