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영월, 한옥에서 만나다

by 가히

서해안의 근대 역사도시에서 태어나 60의 나이인 지금까지 살아왔다. 스무 해가 넘도록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하며 교사라는 이름이 내게 꼭 맞는 옷이라 믿었던 쉼 없는 시간이었다.


평생직이라 여겼던 일을 내려놓은 뒤 하고 싶던 일들을 천천히 꺼내 놓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일상의 여유를 기대했다. 하지만 하루는 또 다른 하루로 밀려가고, 취미인지 일인지 분간 안 되는 날들이 한 달 또 한 달을 지나 해를 넘겼다. 마음만 앞선 채 여유는 늘 뒤에 서 있었다. 이런 내게 새해와 함께 찾아온 뜻밖의 선물은 아들이 준비한 강원도 영월의 한옥 종택 가족여행이었다.


세계적인 루브르 디자인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받은, 한국의 미학을 살린 전통 한옥이라는 아들의 설명에 잔뜩 기대가 되었다. 나와 달리 먼 거리와 부담스러운 비용에 망설이는 남편이었지만 잘 난 아들 덕이니 함께하자 설득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에서 만난 아들과 영월로 향했다.


서울을 벗어나 두 시간을 훌쩍 넘긴 산길은 꼬불꼬불 이어졌고 늦은 오후에 도착한 <더한옥 헤리티지 하우스>는 첫 모습부터 압도적이었다. 10만 평이 넘는 대지 위에 펼쳐진 한옥들은 한 채 한 채가 위엄을 품고 서 있었다. 200평이 넘는 독채들과 여러 개의 객실로 이루어진 한옥 호텔을 품은 건물들, 누각이라 불리는 로비 한옥까지 더해져 마치 궁궐을 옮겨 놓은 듯했다. 대목장이 지은 건물들은 기둥 하나, 곡선 하나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산책로인 소나무가든과 야외정원은 산세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직원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이틀간 머물 종택 ‘휴(休)’로 들어섰다.


대문이 열린 종택 입구에 들어서자 널찍한 마당이 우리를 반겼다. 본채 앞에 놓인 섬돌 위에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선 후 방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나무 향이 환영 인사하듯 살며시 다가왔다. 못 하나 박지 않고 끼워 맞춘 구조라는 설명처럼 바닥과 창, 천장이 모두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이어졌다. 외부에서는 단층처럼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1층과 지하층이 연결된 입체적 공간이 펼쳐졌다. 단아하고 웅장한 내부와 깊고 유연한 외부가 어우러지며 안과 밖이 자연스럽게 호흡하고 있었다. 각 채를 이어주는 공간은 궁궐의 회랑처럼 기품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널찍한 다이닝룸과 거실이 나타났다. 갤러리 같은 벽면의 작품들, 도자기와 나무 한 그루가 어우러진 공간은 탄성이 나올 만큼 세련돼 보였다.

그러다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거실에 놓인 나전칠기장이었다. 80여 년의 세월을 품었다는 장롱은 자개빛이 고요히 흐르며 어떤 명품보다 깊은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보존 상태, 장인의 손길이 남긴 결들이 오래도록 내 눈과 마음을 붙잡았다. 옆면에 빼곡히 새겨진 많은 한자의 뜻은 몰라도 그 정성만큼은 분명히 전해졌다. 나는 감탄과 놀라움으로 사진 찍기를 멈추지 못했다.



한옥 투어로 정신을 빼앗긴 나를 진정시킨 후 저녁 식사를 위해 한옥 식당 <몬토>로 향했다. 그곳에서 받은 진수성찬의 저녁과 청정한 영월의 자연 속에 고요한 밤을 보내며 여행의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강원도에 눈 예보가 있었다. 동생 부부를 기다리며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과 영월 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선돌전망대를 찾았다. 서강 절벽 위에 우뚝 선 기암과 강이 어우러진 경관이 차가운 바람에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기둥처럼 솟은 거대한 선돌이 겨울바람 속에서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서 있었다. 그 사이에 흐르는 얼어붙은 서강의 허연 바닥이 겨울의 절경이 되어 숨을 쉬는 듯했다. 바위와 강, 바람과 침묵이 한 장의 수묵화처럼 겹쳐졌고 색을 덜어낸 자리마다 오히려 깊이가 생겼다. 나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겨울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계절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단정하게 세상을 보여주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산길을 넘어 오후 늦게 동생 부부가 도착했다. 우리는 전통주를 곁들인 주안상인 <술시> 체험을 하며 눈 내린 영월의 겨울을 환상처럼 맞이했다. 우리 두 자매의 끝없는 수다로 이어진 밤 뒤에 맞은 둘째 날 아침 풍경은 설원의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고요한 한옥 위로 내려앉은 눈빛은 세상을 잠시 멈추게 한 듯했다. 우리는 임금님 수라상처럼 차려진 한식 한 상으로 아침을 먹고, 눈 내린 고택 주변을 느리게 걸었다. 발밑에서 눈이 사각거리며 아쉬운 둘째 날의 하루를 열어 주었다.


여행은 멀리 가는 기회가 아니라, 멈춰 서는 시간이 아닐까. 바쁘게 달려온 일상 속에서 나는 늘 다음을 향하며 지금을 바라보지 못했다. 영월의 한옥에서 보낸 이틀은 속도를 내려놓고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세상은 넓다. 갈 곳도, 만날 풍경도 많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머무느냐였다. 생각을 비우고 마음으로 감탄하니 눈은 즐겁고 입은 행복해졌다.

눈 내린 종택에서 생각했다. 조금 느려도 괜찮고 잠시 멈춰도 괜찮으며, 다시 시작하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한다.

세상은 넓고 내가 걸어갈 방향 또한 아직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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