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딸기가, 달콤한 단팥죽이, 매콤한 비빔국수에 겉바속촉 군만두까지. 계절과 상관없이 어릴 적 먹었던 추억 속 음식들과 며칠 전까지 진심 맛있게 먹었던 것들이다.
"너는 참 좋겠다. 아직도 그리 먹고 싶은 것들이 많으니"
어릴 적부터 툭하면 이것이 먹고 싶어. 저것이 맛있겠다고말하는 딸이 얄미운 듯부러운 듯엄마가 내게 한마디 한다.
나이 들어가는 딸이 먹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그동안 먹기 싫고 맛없다는 것들은 왜 없었겠는가. 그런 딸이 가끔은 귀찮고 밉기도 했을 것이다. 개성 가득한 딸 다섯을 키우며 속상하기도, 울기도 많이 했다는 엄마의 옛 시절 얘기에 다섯 딸 모두가 문제의 주범으로 소환되는 걸 보면 엄마의 시집살이는 우리 딸들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엄마의 까탈을 참 잘 받아주는 큰 딸이다. 음식취향과 패션 감각에 여행 관심사까지어느 것 하나 무난하지 않은 우리 엄마.
딸들의 선물을 받으면 평균 한번 이상 교환이 필수, 가족모임 외식메뉴 1번은언제나 엄마취향을 따른다. 함께 하는 휴가여행은 중간에 해약을 할 만큼 트집의대명사다. 그럼에도 딸만 가진 엄마는 세상 행복한 할머니임에 틀림없다.
며느리가 있었다면 분명코 아들 내외와 의절했음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시집살이를 했던 엄마세대의 여성들과는 달리 우리 엄마는 입만 열면 아들, 아들 노래 부르던 아들선호사상의 꽉 막힌 여자다. 평생 딸 바보로 아들의 '아'자도 말한 적 없는아빠와 달리 엄마의 아들선호는 하늘을 찔렀고 딸들이 결혼해 손주를 본 후에야 소원성취를 했다. 나의 두 아들에게도나보다 더 자주 연락하며 아들 같은손자들로 여긴다.
"엄마의 자기중심적사고방식은 모두 큰 언니 책임이야."
"언니가 끝없이 받아주니 딸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지."
"나는 진짜 엄마 안 보고 싶어"
동생들은 불만으로 아우성치며 엄마와의 갈등이 시도 때도 없이불화로 계속되었던 지난 시절. 그럼에도 딸들은 돌아서면 엄마를 이해하고 다시 모여 호호 깔깔 댔다. 해결사는 언제나 큰 딸인 나였다. 힘들고 진 빠지게 반복되는 화해게임 해결사가 된 이유는 바로 엄마를 향한 측은지심 때문이었다.
딸들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평생 딸바보아빠. 특히 큰 딸인 내게 보이는 찐한 딸사랑과는 달리 엄마를 향한 아빠의 건조한 무관심은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딸인 내겐 아픈 손가락이자 가슴 한쪽 답답함이었다.
젊은 시절, 아빠의 바람 때문에 온갖 지병을 얻었다며 남편을 평생의 지탄과 원망의 대상으로 여겼고 그런 엄마를 우리 딸들은 안쓰러워했고 이해했다. 딸들의 공감백배를 자신의 위로이자 무기로 삼아 수시로 아빠를 공격하며 엄마는 과거의 자신에서 나오지 못했다.함께 늙어가는 아빠에 대한 용서도 없었다. 엄마를 향한 아빠의 충분한 사과가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아빠를 향한 엄마의 애증 같은 애정타령은 나이 80이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아빠의 대답이 조금만 퉁명스러워도, 엄마의 부탁에 대답이 늦어도, 차려놓은 음식 맛에 칭찬이 없어도 우리 엄마는 서러워했고 화를 냈다. 귀가 잘 안 들리면서 엄마의 애정결핍 증상은 심해졌고 딸들은 치매가 아닌지 걱정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원인과 해답은 아빠였다. 아빠의 친절한한 마디와 엄마를향한관심이 모든 문제를 한 방에해결하는 의사 선생님이자치료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달라지기 시작했다.엄마의 평생소원인 남편의 관심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 세월이 가져다준 선물 같은 것이었을까. 남편을 향한 평생의 진심이 노년의 아빠를 변화시켰던 것일까.
평소엄마를 향해 다정함이라고는없던 아빠의 눈길이 늙고 병든 아내를 향했다. 측은지심에미운 정, 고운 정으로 엄마를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다.하루 세끼를 평생 받아 드시던 아빠는 이제 매 끼니를 손수 차려 마누라 앞에 놓아주며 챙겼다. 매일 하시던 운동도 엄마가 원하는 시간에 다녀오는 자상함으로 배려하는 남편이 되었다.
"살아 있는 한 엄마는 남은 평생 동안 내가 잘 보살필 거다."
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아빠의마음인 줄 알지만 엄마 곁에서 평생 함께 하겠다는 아빠의 한 마디는 엄마를 향한 뒤늦은 고백 같아 기쁘고 행복하다.
늙는다는 것은 슬프지만 곁에 함께할 누군가와 평생을같이 하는 것이 잘 늙어가는 모습이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