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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세기소년 Aug 18. 2020

왕자는 서울대에 가고 싶다 #1

김치 미러




"왕자입니다."

 

"외자야? 성이 왕이고?" 배달업체 매니저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아, 아니요. 성은 저... 전 씨입니다. 전. 왕. 자입니다." 나는 왜 바보같이 이름만 말했을까. 뭐 상관없었다.

"그래, 뭐 배달은 해봤고? 오토바이는 탈 줄 알지?"

"네." 이 배달업체 매니저라는 놈은 고작 배달원 하나 뽑는데 굉장히 궁금한 것도 많다.


 원래 내 이름은 '전왕자'가 아닌 '왕자'. 즉, 외자였을 수도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시골에서 한평생 고추밭을 운영해온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본래 우리 가문은 왕 씨 성을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기, 태조는 고려의 씨를 마르게 하기 위해 왕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죽였다고 했다. 따라서 당시 우리 가문을 비롯한 왕(王)씨 가문들은 획을 살짝 추가한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등으로 성씨 개명을 한 것이라며 아버지로부터 귀가 닳도록 듣곤 했다. 우리 가문은 하필 그중 '밭(田) 전' 자를 채택했다. 왕의 성씨에서 농민의 성씨가 된 것이다. 난 지금 우리 집이 고추 농사를 짓게 된 것에도 이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왕 씨 성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내 이름에 굳이 ‘왕’을 넣었다. 덕분에 난 전왕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풀어서 '밭의 왕자' 그게 내 이름의 뜻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 따위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평생 고추밭에서 열심히 고추를 따는 일만 하셨다. 고생해서 따온 고추를 시장에 팔고 돌아오는 날에는 늘 삼겹살을 사오시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하나뿐인 내가 잘 먹고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그런 부모였다. 낯 간지럽지만 늘 “우리 왕자”라고 불렀으며 여느 부모처럼 낙연하게 내 장래를 기대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기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커서 군인이나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직업군 중에서 몇 안 되는 좋은 인상을 가진 직업들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추밭을 받아 가업을 이어가라는 끔찍한 소리는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내심 그건 싫으셨나 보다.


 고등학교 삼 학년을 마쳤을 때 난 형편없는 수능 성적을 거두었다. 그때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티브이를 틀면 나오는 예능이나 드라마 속 서울은 굉장히 근사해 보였다. 당장 가면 뭐라도 될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서울에 살기에 상당히 많은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사투리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여의도 63 빌딩에 가본 것 빼고는 단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그때의 기억마저도 거의 희미하다. 나는 항상 티브이 드라마나 예능 속 연예인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난 능수능란하게 곧 잘 따라 했다. 그렇게 나는 학급에서 사투리를 쓰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분명 서울 출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난 그때마다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른 서울에 가서 말을 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그 누구든 말이다.


 부모님은 목돈을 이용해 서울 관악구에 있는 허름한 원룸 빌라의 보증금을 내주셨다. 나는 그 돈이 부모님이 모아둔 내 대학 1년 치 등록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지방에서 또 다른 지방으로 대학을 다니기는 싫었다. 상당히 우울할 것 같았다. 나는 서울에 집을 구하자마자 동사무소에 들렸고 새로운 주민등록증부터 만들었다. 어쨌든 난 서울 시민이 되었다.


 부모님은 직접 이사를 도와주셨다. 방도 말끔히 청소했고 우리 가족은 4평 남짓한 좁아터진 원룸에 모여 신문지를 깔고 자장면도 함께 시켜 먹었다. 어머니는 나를 걱정하셨다. 연고도 없는 데서 고생길이 훤하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조용히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해서 걱정을 넘어 후회를 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모아 온 돈이지만 이렇게 쓰는게 맞는걸까, 뭐 대충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더 모른척했고 일부러 더 기뻐했다. 나의 벅찬 행복을 본 부모님은 나를 함부로 저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냉정하게 보증금은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제 서울에 집이 있는 진짜 서울 시민이었다. 내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건 보증금 까지였다. 이 정도에 만족했다. 월세는 직접 벌어야 했다. 50만 원이라는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일을 찾았다. 그렇게 배달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게 된 것이었다. 꼬치꼬치 캐묻는 이 매니저라는 놈을 보니 서울깍쟁이란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 듯했다.


"그래, 그럼 일은 당장 가능한 거고... 계속 여기 살았니?" 놈이 계속해서 물었다.

"네. 쭉 여기서 살았습니다."

"대학생?"

"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기특하네. 한참 놀 나이인데." 배달업체 매니저는 마침내 경계를 풀고 옅은 미소를 보였다.


 만족스러웠다. 서울에 온 지 이틀 만에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어느새 나는 서울에 직장이 있고, 집도 있는 서울 시민이 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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