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미러
스튜디오의 홀로그램들이 빛을 내뿜으며 의자에 앉아있는 인간의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언뜻 보아도 사연자가 여성임을 알 수 있었지만 이외의 자세한 생김새는 드러나지 않았다. 오진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소 어수선 해진 관중들의 시선은 어느새 여성의 실루엣을 향해 있었다. 여성은 어떠한 인사나 소개도 없이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와 섬
[엄마는 화가였어요. 제가 세상에 나왔을 때 엄마는 혼자였죠. 저를 키우면서 단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걸 쉬지 않으셨어요. 엄마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소통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었죠. 그녀에게 있어 그림과 하나뿐인 딸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어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같이 그림 그리는 것을 꽤나 좋아했어요. 엄마의 작품들에는 항상 제 모습이 들어가 있었죠. 잠에 든 모습, 우는 모습, 웃는 모습 등은 물론이고 어쩌다 제가 엄마의 캔버스를 낙서로 더럽히면 엄마는 또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어요. 그리고 그것들을 전시하고 출품했죠. 저는 늘 엄마에게 있어 영감이었고 작품이었어요.
여덟 살 때쯤이었을 거예요. 저는 아빠가 보고 싶다며 생떼를 쓰고 울었어요. 엄마는 저를 무릎에 앉히더니 새하얀 종이에 한 남자를 그려 나갔어요.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헝클어진 머리에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듯한 남자의 뒷모습이었어요. 표정이나 얼굴 생김새도 안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남자가 근사하다고 느꼈죠.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어요.
"시아야. 아빠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어. 딸이 봐도 첫눈에 반할 만큼."
엄마가 미대에 다니던 젊은 시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대요. 예고르라는 이름을 가진 카자흐스탄 출신의 노동자였어요. 예고르와 엄마는 학교 내 식당에서 만났어요. 예고르는 교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거든요. 예고르는 엄마를 보고 첫눈에 반했대요. 매일같이 엄마에게 손 편지나 시를 적어 보내며 한글을 연습했죠. 할머니 할아버지는 오갈곳 없는 그 외국인을 마음에 안 들어했죠. 예고르가 쓴 손글씨가 적힌 편지나 시를 보면 화가나 갈기갈기 찢어 버리곤 했죠. 엄마는 쓰레기통을 뒤져 편지 조각 하나하나를 맞추고 읽어보았대요. 서툴지만 썩 아름다운 글귀들이 적혀있었죠. 엄마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구나 한번에 알 수 있었대요.
둘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오랫동안 만났어요. 그리고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이 사실을 부모님께 알릴 자신이 없었어요. 결국 예고르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나왔죠.
엄마와 아빠가 정착한 곳은 빨간 등대가 있는 예쁜 바닷가 섬 마을이었어요. 엄마는 거기서 그림을 그렸고 아빠는 바닷가에 나가 일자리를 찾아다녔죠. 엄마는 그 바다 마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대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불법 체류자인 외국인 아빠를 환영해주지 않았죠. 어느 배도 아빠를 받아주고 태워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래도 엄마 아빠는 행복했어요. 여전히 돈이 없을뿐이었죠. 결국 아빠는 엄마와 뱃속에 있는 저를 위해 돈을 벌어오겠다며 서울로 향했어요. 엄마는 불안했대요. 따라가겠다 졸랐지만 아빠는 금방 돌아올거라며 완강히 거부했대요. 엄마까지 움직이면 고생길이 훤했으니까요. 아빠는 서울에서 돈이 될만한 일은 가리지 않고 다 했대요. 주로 낮에는 공장에서 일했고, 주말 저녁에는 술집에서 서빙을 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에서는 로봇 활성화 정책을 시작했어요. 대부분의 서비스업과 제조업 직종들이 수도권지역을 기반으로 로봇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죠. 아빠의 일거리들이 줄어들었죠. 기술, 경력, 그리고 연고지도 없는 아빠에게 돈을 줄 곳은 더이상 없었어요. 그때 아빠의 직장 동료가 아빠에게 일자리 하나를 소개시켜주었죠. 대형 제약사에서 암암리에 주최했던 불치병 백신 생동성 실험이었죠. 아빠가 참가자 조건에 적합하게 들어맞았대요. 실험 참가자들이 받는 보상 금액 역시 큰 액수였죠. 아빠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아빠는 만삭이 된 엄마를 찾아갔어요. 한 달안에 큰돈을 벌어 오겠다 했대요. 그리고 다시 엄마한테 돌아오지 못했어요.
실험실에 들어간 예고르는 임상실험 중 사망 판정을 받았어요.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던 아빠의 죽음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고, 누구도 관심을 가질 수 없었죠. 제약사도 이 허점을 노렸던거죠. 제약사의 관계자중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직원 한명이 엄마가 있던 섬마을 주소로 예고르의 옷과 조금의 돈을 보냈죠. 엄마는 땀냄새가 베인 예고르의 헤진 남방과 청바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어요.
남편의 주검도 보지 못한 체 남편을 보내야했던 엄마는 정신이 나가버렸대요. 아빠는 장례식도 못 치루고 엄마 곁을 급하게 떠났어요. 엄마는 저를 홀로 키워냈죠. 엄마는 정부 보조금을 받아가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어요.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 저는 엄마가 싫어지기 시작했죠. 엄마의 궁핍한 삶이 정말 끔찍하게 싫었어요. 뭐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어른이 연필이나 붓이나 잡고 예술거리면서 늙어가는 게 굉장히 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그 비참한 인생의 부산물이 저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부정적인 생각들은 점점 나를 압도했어요. 남들과 내 인생을 비교를 하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다른 피부색과 모질, 가난, 내가 갖지 못한 남들의 긍정적인 표정, 웃음 등등 저는 비교할 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나갔어요. 점점 엄마를 증오했죠. 엄마의 표정, 성격, 행동, 습관, 가난을 비롯한 그 모든 것들이 꼴도 보기 싫었어요. 심지어 엄마의 좋은 점들까지도요. 저는 엄마한테 실컷 외쳐댔어요.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난 당신처럼 살기 싫어"처럼 뻔한 클리셰적인 말들도 거침없이 쏘아댔죠.
그래도 유전이 무섭더라고요. 그런 엄마의 딸인 제가 물려받은 게 바로 그런 것들이었어요. 장점부터 사소한 단점까지 모두 말이에요. 표정, 성격, 행동, 습관 가난 그런 것들 말이에요. 저는 가끔씩 엄마처럼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요. 자신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보일 때가 제일 괴로웠거든요. 엄마처럼 살 것 같았어요. 지독하고 외롭게 말이에요.
성인이 되자마자 저는 서울 소재 대학교의 건축과에 입학했죠. 집을 나와 자취도 시작했어요. 엄마와 떨어져 지내고 싶었거든요. 대학 생활은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갔어요. 당장 월세를 내기에도, 먹고 살아가기에도 바빴어요. 연애는 커녕 저는 친구도 없었죠.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항상 돈은 모자랐고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해서 엄마 생각이 났어요. 전 그 마음을 억지로 외면했죠.
엄마도 항상 저를 보고 싶어 했지만 저는 웬만해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어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하는 걸 알면서도요. 고향으로 가면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것 같았어요. 저는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싶었죠. 이따금씩 엄마는 제 자취방으로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보내곤 했어요. 덕분에 자취방에는 엄마의 그림이 쌓여만 갔죠. 어느 순간 저는 참다못해 엄마에게 질색하며 화를 냈어요. 그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저에게 그림을 보내지 않았죠.
저는 졸업을 하고 꽤 건축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가고 싶은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서 핸드폰을 뒤적거렸어요. 막상 소식을 전하려보니 몇명 안되는 연락처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라고는 엄마밖에 안보이더군요. 저는 뜬금없이 아주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했어요. 엄마의 반응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어요. 저는 그때 우리 사이에 확실한 경계가 생겼다고 느꼈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느끼면서요. 어짜피 새로운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실무에 투입된 지 며칠 뒤였어요. 엄마의 집에 큰 화재가 있었어요. 이모에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어요. 급하게 본가로 내려갔죠.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어요. 가스불에 의한 사고였거든요. 의사 선생님은 엄마에게 알츠하이머 진단을 내렸어요. 진작에 앓고 있었다고 했죠. 이제 막 쉰 살에 접어든 엄마에게 치매라는 진단은 가혹했죠. 외부의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살아온 엄마가 짊어져야할 대가였을까요, 아니면 하나뿐인 엄마를 방치하고 무시한 딸에 대한 신의 경고였을까요. 저는 또 다시 엄마와 엮였죠.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밀려오는 죄책감과 자책들이 제 목을 죄어오고 있었어요.
엄마는 정신이 돌아올 때면 두려움에 떨었어요.
"내가 너까지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화재가 난 엄마의 집에서 유일하게 멀쩡히 살아남은 건 일곱 살인 저에게 그려줬던 아빠의 뒷모습이 담긴 그림이었어요. 엄마는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이나 그림을 응시했어요.
"여기에는 우리 딸 그림이 엄청 많은데 어쩌지. 미안해 딸 엄마가 다 태워버렸어, 엄마가..."
엄마는 한 장의 그림을 안고 서럽게 울었어요. 태어나서 엄마가 그렇게 서럽게 운 걸 본 적이 없었어요. 엄마는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인적이 없었거든요. 병원 퇴원 날, 저는 엄마를 조수석에 태우고 함께 서울로 향했어요. 그리고 아빠의 뒷모습이 담긴 그림을 건넸어요. 엄마는 무릎 위에 그림을 올려 두고 쓰다듬었어요.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창문을 서서히 두드리고 있었어요. 엄마는 창문에 머리를 대고 곤히 잠에 들었죠. 그리고 두어 시간쯤 지나서야 잠에서 깨었죠. 엄마는 자기 무릎 위에 놓여있는 그림을 빤히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어요. 자기가 드린 그림을 보며 제가 그렸냐고 묻더군요. 저는 제가 그렸다고 거짓말을 했죠.
"딸, 나는 이 그림 좋아."
"잘 잤어?"
"응, 이 남자는 누구야? 딸 만나는 사람?"
"응."
"마음에 쏙 든다. 어쩜 이리 잘 그렸어?"
"그래? 뒷모습밖에 안 보이는데?"
"그래도. 좋아.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서울. 엄마, 이제 우리 같이 살아."
"진짜? 그럼 이제 딸이랑 맨날 같이 있는 거야?"
"응 엄마. 우리 이제 같이 살자. 여행도 가고."
"엄마는 딸이랑 가는 거면 어디든 좋아! 근데 엄마 창문 열면 안 돼?"
"안돼 엄마. 비 많이 와. 감기 걸려."
엄마는 제 말을 듣지 않고 창문을 열었어요. 유리창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굵은 빗방울에 뺨을 갖다 댔어요. 그리고 창밖에다 고개를 내밀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의 얼굴과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흠뻑 젖어갔어요. 엄마는 그 와중에도 좋다며 머리를 쓰러 넘기고 입을 벌렸어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이에요. 저는 빗줄기가 거세져 엄마를 다그치며 창문을 닫으라 했어요. 엄마는 까르르 웃으며 제 말을 통 듣지 않았어요. 저는 화가 났지만 그렇게 활짝 웃는 엄마의 얼굴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반대 차선에서 굉음이 들렸을거에요.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반대편 차선에 있는 트럭 하나가 가드레일을 날아 올라 저희 위에 붕 떠있었죠.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큰 트럭은 엄마와 제가 타고 있던 차를 집어삼켰어요.
병원에 이송되는 동안에 한두 번씩 정신이 돌아왔는데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빨간 피로 뒤 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엄마의 얼굴이 보였죠. 그와중에 제발 엄마가 살아만 있으면 했어요.
응급실에 도착해서야 정신이 돌아왔어요. 저는 팔에 꽂혀있던 링거를 빼내고 엄마를 찾아다녔어요. 간호사들과 의사가 저를 저지했어요. 저는 엄마를 찾다가 이내 엄마를 살려달라며 울부짖었어요. 점점 모든 걸 잃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의료진들은 제 몸상태도 확인을 해야 한다며 저를 설득했죠. 저는 울다 지쳐 이미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어요.
저 멀리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인 엄마는 보이지 않았어요. 응급환자들이 사방에서 밀려들어왔어요. 보통은 저희와 같은 교통사고 환자들이었죠. 그리고 제 눈앞에는 수면제를 복용해 자살기도를 시도한 젊은 여자가 이마에 선홍색 실핏줄을 드러내며 피거품을 물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어요. 여자의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은 울부짖으며 자신의 부인을 따라가고 있었죠. 순간 그들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웠어요. 왜냐고요? 적어도 우리는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차라리 저 여자의 목숨을 가져가고 우리 엄마는 살려 주었으면 했죠. 하지만 엄마는 쉽게 깨어나지 않았어요. 뇌출혈이 심했어요.
엄마는 수 개월동안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해 수 차례의 뇌 수술을 견뎌내야 했어요. 그리고 점점 주요 신체 기관들이 하나씩 잠에 들기 시작했죠. 담당 의사는 저를 불러 엄마의 상태에 대해서 말해주었어요. 사고 직후 뇌손상이 너무 심하고 현재는 숨만 붙어있는 수준이며 깨어날 확률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더 나빠져 뇌사판정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선생님은 살면서 이런 개같은 통보를 수도 없이 해오셨겠죠. 알아요. 저도 선생님께 그저 수많은 절규중 하나뿐이라는 거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되있어요."
의사 선생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좀 더 있다가 나가도 괜찮다는 말씀을 해주셨죠. 하지만 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 밖으로 나갔어요. 의사 선생님은 저를 부르더니 한참을 주저하는 듯했어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시고는 책상 밑에서 상자 두 개를 꺼내 보였어요. 상자에는 작은 테디베어 그림과 드림 클럽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어요. 몇 개월 만에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이슈를 몰고던 테디베어사의 드림클럽 캡슐이었죠.
의사 선생님은 저에게 드림 캡슐의 사용법에 대해 알려주었어요. 선생님은 드림 캡슐을 사용하는 동안 철저히 외부에 비밀을 유지할 것을 부탁했어요. 사실 베타테스트 참여자 잔여석이 남아있었다는 것조차 놀라웠죠. 이로 인해 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었죠. 하나는 이대로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런 엄마를 꿈에서라도 볼 수 있는 것이었어요. 저는 후자를 택했어요. 저 말고 여러분들이었어도 그렇게 했겠죠.
그날 밤, 엄마의 귓속에 드림 캡슐을 주입했어요. 이어서 제 귀에도 주입했죠. 체 오분도 안돼서 잠이 쏟아졌어요. 저는 병실의 간이침대에 몸을 눕혔고 정신을 잃듯이 빠르게 잠에 들었어요. 의식은 마치 교차하듯이 깨어났어요. 눈을 떠보니 캡슐 속 초기 설정 화면이었어요. 매뉴얼을 따랐어요. 세팅을 마치고 서버 동기화를 위해 드림 클럽 실행 버튼을 누르고 캡슐에서 내렸죠. 눈앞에 자동문이 보였어요. 다가가니 자동문이 열렸어요. 문이 열리자 눈앞에는 층고가 높은 거대한 미술관 복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요. 양쪽으로는 수많은 명화들이 걸려 있었죠. 마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 복도 한복판에 서 있는듯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고흐, 모네, 달리, 호크니의 그림들도 걸려있었고요, 중간중간에는 엄마가 그린 그림들도 섞여 걸려 있었어요. 전부 다 제가 어릴 적 좋아하는 그림들이었어요. 옛날 그림을 좋아했을 때가 떠올랐어요.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하고 행복했죠. 바닥에는 동기화 진행 상태가 표시되고 있었어요. 그림들을 감상하며 복도를 걷는데 엄마가 그린 아빠의 뒷모습도 보였어요. 잊고 있었는데 말이죠. 무척이나 반가웠어요. 동시에 울컥하기도 했죠. 어느새 동기화 진행은 98%를 가리키고 있었어요. 사고가 났던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엄마가 그린 그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다시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반가웠어요.
동기화 100%가 채워지자 복도 한편에 접속 포털이 생성되었어요. 저는 그림을 더 보고 싶었지만 혹시나 기다리고 있을 엄마 생각에 황급히 이동했어요. 포탈 위에 올라서자 이내 푸른빛이 시야를 덮었고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어요. 그리고 수 초쯤 지나자 드림 클럽 라운지에 도착해 있었어요. 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았어요. 프런트로 달려가 물었지만 리셉션 데스크 직원의 대답은 접속자 신상 정보는 공개할 수 없다는 말뿐이었죠. 저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어요.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엄마를 찾기 시작했죠.
5화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