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 예술과 녹지 한복판에서 가면을 벗다
[전편에 이어 계속] https://brunch.co.kr/@jmseria/26
나는 저택을 지나쳐, 뒤편의 정원 속으로 들어간다. 중앙으로 잔디와 나무를 말끔히 가다듬은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진다. 양 옆으로는 손이 덜 묻은 자연스러운 나무와 꽃들이 솟아 있고, 바닥에는 낙엽이 어지러이 떨어진 아늑한 녹지가 감싸고 있다. 나는 옆쪽의 외진 오솔길이 좋아, 그리로 걷는다.
나무들 사이로 곳곳에 어우러진 로댕의 습작 조각들이 운치를 더하는 산책길. 파리의 유명한 뤽상부르나 튈르리 공원의 커다랗고 뻥 뚫린 느낌과는 아주 다르다. 아늑하고 아담한, 도시의 번잡함으로부터 탈주해 비밀의 정원에 숨어 들어온 느낌에 끌리는 곳. 시내를 걸어 다닐 땐 간혹 코를 불쾌하게 하는 악취, 그것마저도 여기가 관광객만 1년에 1600만 명이 몰려 우글댄다는 파리임을 실감케 했다. 여기는 진한 풀내음만이 그득하다.
느릿하게 걷다가, 나무 아래 벤치에 앉는다. 짙은 녹색의 이끼가 사이사이 낀 소탈한 나무 의자 정취가 그윽하다. 여기는 정원의 왼쪽 가장자리, 끄트머리에 놓인 의자, 고요한 정원 중에서도 고요한 곳, 인기척이 멀어진 순간, 나는 누워버린다. 나뭇가지가 적당히 햇살을 가리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귀에 은근히 닿는다. 감촉이 좋다. 흔들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간혹 옅은 햇살이 비춰온다. 눈을 감는다.
이렇게 상황은 변하는구나. 지나가 버리는구나. 저기 저 나뭇잎에 머물렀다 흘러지나 가는 허공의 바람처럼 가버리는구나.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 아까(앞편) ‘사치의 거리’에서 처절한 우울에 몸서리치던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 돌이켜보니, 서울에서도 불안했고 불확실했고 좌절의 그늘에 휩싸여 그 순간이 전부인 양 암흑으로 빠져들 때, 답은 없었다. 그저 그대로 두고 지켜보는 것 밖에는. “상황은 바뀌기 마련이고...” 나는 영화 '오래된 정원' 윤희의 짧은 대사를 계속 곱씹고 있다.
예술과 자연의 향기 속에서 점심식사
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고프다. 나른해진 몸을 일으켜 돌아다니다 보니, 정원 오른쪽 모퉁이에 식음료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있더라. 숲 속에 고요히 자리한 푸른 카페, 야외에 놓인 테이블에 앉는다. 마음에 드는 자리다. 이해할 수 없었던 파리의 풍경. 찻길 바로 앞에 들어선 카페나 비스트로, 그곳에서 매연과 함께 수다 떨고 음식을 먹는 파리지엔들. 지나다니는 사람과 자동차를 구경하긴 좋을지 몰라도, 음식을 먹기에는 탁해 보였다. 나는 차라리 바게트 샌드위치를 싸들고 걷다가, 적당한 나무 아래 벤치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나 여기는 매연에서, 거리의 먼지에서 벗어나 싱그러운 꽃과 나무에 둘러싸인 아늑한 자리.
오랜만에 느긋하게 끼니를 때우겠다는 생각에 들뜬다. 기분을 더 내고 싶어서 보르도 와인 한잔을 주문한다. 1인용으로 적당한 쁘띠(petit) 샐러드와 함께. 그리고 배낭에는 어제 베트남 식당에서 먹다 남아 싸들고 온 볶음밥이 있다. 과거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그 파고로 삶터를 옮겨온 사람들, 그 흔적이 파리 곳곳에 있는 베트남 식당이다. 거기서 공수해온 볶음밥과 여기 샐러드와 와인을 곁들이고 있다. 상쾌한 자리, 여유로운 풍경, 분위기에 취하는 맛, 전혀 고급 음식도 맛집도 아니지만, 멋스러운 점심을 만끽하는 순간.
실제 로댕 정원은 느긋하게 점심 즐기기 안성맞춤인 곳. 주위를 보니 관광객은 물론 주민 혹은 직장인으로 보이는 파리지엔들도 끼니때 들러 담소와 더불어 배를 채운다. 잔디나 숲 속 벤치에 도시락을 펴놓은 모습도 살갑다. 아담한 예술 정원이다 보니 시끌벅적하진 않다. 평화롭다. 책 읽는 사람도 자주 보인다. 분수대 뒤편 정원 끝자락에는 해변에나 있을법한 썬 베드가 놓여 있다. 누운 듯 앉아,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전등 삼아 책 보는 사람들.
홀로, 로댕 정원에서 춤을
식사를 마치고, 다시 정원을 거닌다. 두꺼운 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낙엽을 밟으며 미끄러지듯 빙글 돌아본다. 그 옆에 놓인 로댕의 흔적, 아직 머리도 없고 팔도 짧은 습작 조각도 빙글 돈다. 순간, 신명이 나서 몸을 흔들거린다. 조각들의 재미난 포즈를 따라 하면서. 와인이 선사한 취기가 나를 흔들어댔을까. 이 사랑스러운 정원의 안락함이 나의 가면을 벗겨놓은 것일까. 설사 누가 본 듯 어떠하랴. 여기는 밤이면 세느강변에서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어울려 춤을 추는 파리. 발에 리듬을 넣고 걷다가, 콧등이 시큰해진다. 일을 내려놓고 일상에서 벗어나 특별히 주어진 소중한 공간과 시간, 그것을 온전히 맞이한 이 순간이 주는 한없는 뭉클함으로.
숲을 빠져나와서, 정원이 훤히 보이는 비롱 저택 입구, 무대처럼 펼쳐진 석조 공간에 오른다. 오른쪽 하늘로는 에펠탑이 보인다. 이어폰을 꼽는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OST에 나오는 파리를 닮은 곡 'Let's do it', 'You got noting'이 이어서 들려온다. 나는 또 룰루랄라 몸을 흔든다. 예술이 깃든 공간에는 치유의 힘이 있나 보다. 여기는 푸름마저 더한 곳, 오후의 햇살마저도 따사로이 들뜨게 하는 곳. 비록 나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정원 곳곳에서 함께 이 감각적인 분위기를 향유하고 있는 이름 모를 인연들, 예전부터 쭉 정원을 드나들었을 세계 각지의 발자취들, 로댕의 위대한 작품들...
아니, 혼자라도 괜찮다. '생각하는 사람' 동상에 취해 있을 때, 고국의 관광객들이 단체로 몰려왔다. 가이드 왈 "구경하시고, 1시간 뒤에 만나요!". 그러나 내가 접한 로댕 정원은 스스로 간직한 속도로 시간을 잃고 하염없이 머무를 곳. 그게 제격인 한적하고 우아한 곳. 그래야만 그윽한 향취에 젖어들 수 있는 곳. 정해진 시간표를 따라서는 결코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곳. 혼자여도 충분한 낭만을 선사하는 그런 충만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