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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Aug 16. 2020

골목 배회, 걸어야 하는 도시 파리

[파리 여행] 라탱 지구, 그리고 시테섬 구석 '일드 프랑스' 광장까지

너무 크지 않으면서도 속이   파리는 걸어 다니기에 완벽한 도시다. 사실 파리의 뛰어난 건축학적 보물들과 낭만적인 도시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걷기보다 좋은 방법이 없을 정도다.”
- 피오나 던컨, 레오니 글래스 ‘파리 걷기여행


#1 라탱 지구를 걷다: 골목 예찬 

파리로 건너와 맞이하는 첫 아침을 적는다. 파리 남쪽에 있는 부그라헨(Bourg la rein)의 민박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시내 중심부로 향했다. 파리에 온걸 곧바로 실감할 수 있는, 도심에 떠있는 파리의 발상지 시테섬(섬 이름도 불어로 ‘도시(Cité)’를 뜻한다)과 그 아래로 흐르는 센 강, 파리의 상징 노트르담 대성당을 향해 눈도장을 찍은 후, 라탱 지구(Quartier Latin) 부근을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 프랑스 최고 학문 기관, 학위는 없고 무료 강좌며 별도 신청 없이 모든 시민에게 열린 곳이라고 함)에서 판테온(Pantheon) 쪽으로 향하는 길. 단번에 골목길 풍경에 사로잡힌다. ‘라탱’은 이 지역에 있는 대학에서 수세기 동안 라틴어로 공부를 했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대학가의 젊은 기운과 학구열은 저항과 반항의 파리 역사와도 연결된다. 파리는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든 1968년 학생/문화혁명, 더 거슬러올라가 파리 코뮌과 같은 정치사회적 격변의 시절에 항거로 불타올랐던 지역이다. 바리케이드와 저항, 열정, 자유, 보헤미안 스타일의 문화들이 수없는 일화들과 함께 거리 곳곳에 깃들어있다.


이런 배경을 피부로 느끼며 동시에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버린다. 오늘은 그냥 걷기로 한다. 


지난번 파리에 왔을 땐, 각종 정보가 담긴 책과 함께 명칭을 대조해가며 샅샅이 한 공간을 맴돌며 걸어 다니곤 했다. 예컨대 이런 식. “거리와 골목들,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의 외관을 눈에 새기며 걸어와야 했으니 하루는 아니더라도 반나절은 족히 걸렸다. 소르본 대학과 콜레주드 프랑스 앞을 지날 때 나를 사로잡았던 고요한 전율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며 생 자크 거리에서 에콜 거리로 접어들던 내 발길의 속도를 나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 함정임, <인생의 사용>


라탱의 골목들은 지도와 목적지 혹은 ‘가이드’ 없이 거닐어도 괜찮다. 때로는 잊어버리고 걷는 게 더 매력적이랄까. 스치는 여행자로서는 반드시 유명하거나 혹은 기구한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명소는 아니다. 이름이 있든 없든 골목 풍경 자체만으로 유람 거리가 많은 이곳에서는. 힘을 빼고 발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우연히 마주해도 절경일 뿐인 라탱에서는. 세월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이끼가 낀 도시 한복판을 그저 느리게 걸어간다. (걷는 도중 'Rue de Lanneau', 'Rue Laplace', 'Rue de Bievre' 등 인상을 남긴 골목 이름을 적어둔다)

“내가 좋아하는 파리는 다만 오래된 길, 오래된 벽, 오래된 집과 광장, 그리하여 오래된 세상, 오랜 세월 돌과 이끼의 자연이 된 도시, 인공이되 가장 숨쉬기 좋은 낙원이다.” - 함정임, <인생의 사용>


우아한 곡선으로 휘어져 있어 보일 듯 말 듯, 어떤 길이 펼쳐질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골목에 이끌려간다. 앞으로 걷던 길을 빠져나와 옆으로 난 길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와우. 역시 또 사랑스러운 골목길이 나타난다. 찰칵.


다른 무엇보다 나를 끌어당기는 파리의 매력이다. 웅장한 건축물 사이로 직선으로 뻗은 대로와 느낌이 전혀 다르다. 어떻게 보면 밋밋한, 그러나 수수함에 더 끌리는 황톳빛 오래된 주택들 사이로 굴곡 있게 뻗어 있는 골목길. 오랜 시간 축적되고 존재해왔을, 온갖 사연의 발자취를 담은 역사이자 여전한 일상으로서 공존하는 곳. 그렇기에 시간을 넘나드는 차원의 낭만과 설렘을 주는 곳. 그 실제 하며 실제 하지 않는 공간을 거닐며, 걸음이 끝나는 길목에서 다시 시작되는 골목을 연이어 걸으며, 리얼한 삶터의 분위기에 도취된다.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들어 있다는 판테온 인근까지 걸었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센 강 쪽으로 향했다. 목적 없이 마냥 걷는 길에 한 곳 애써 점을 찍어 들른 곳이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자정 종이 울리면 주인공이 마차 타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출발의 장소. 생 에티엔 뒤 몽 교회(Saint-Étienne-du-Mont, 판테온 바로 근처더라). 날이 환해서 그런지, 지금은 영화처럼 환상을 거니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온 데 간데없다. 정오 무렵.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삼삼오오의 파리 시민들이 지나다니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일 뿐이다. 그래도 잠시 주인공이 걸터앉은 계단에 나 역시 슬쩍 앉아 봤다. 영화의 낭만을 떠올렸지만, 상상은 현실이 되진 않았다.


#2 일드 프랑스 광장에 앉아… 이제사 완연히 파리에

다시 센 강 근처로 왔다. 시테섬으로 건너간 후 섬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시테섬과 나란히 센 강 위에 떠있는 생루이섬(파리 중심에 떠있는 두 개의 자연섬 중 하나, 시테섬과는 생루이 교로 연결되어 있다. 두 섬 모두 작아서 금방 걸어간다) 쪽으로 걸었다.


시테섬의 오른쪽 끝, 생루이섬이 바라보이는 구석 자리에 푸르른 정원이 숨어 있다(왼쪽 끝에도 ‘베르갈랑’이라는 작은 정원이 있다). 일드 프랑스 광장(square de l’ile de France). 앞쪽으론 Memorial des Martyrs de la Deportation, 즉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간 프랑스 시민과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는 곳(아쉽게 닫혀 있어 구경은 못했다). 여기도 한적하다. 광장 뒤편을 푸른 나무들이 일렬로 막고 있어서, 시끌벅적한 노트르담 성당과 주변의 요한 23세 광장(Square Jean XXIII)의 번잡함을 자연스럽게 차단한다. 파리의 한복판임을 잊게 하는 조용한 곳이다. 파리에는 이런 작은 광장이나 공원이 여기저기 많구나. 한가로이 책을 보거나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 그냥 멍하니 사색 중인 사람들이 제각기 앉아 있다. 그들 주변을 거닐다가 나도 벤치에 앉는다. 느린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본다. 이번 여정은 ‘느림’이다.


앉아 있다가, 이어폰을 꼽는다. 여정을 함께한 앨범(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OST)에 있는 ’Bisto Fade’, ‘Je Suis Seul Ce Soir’가 이어서 흘러나온다. 여름날 강렬한 햇살이 조금 약해진 채 센 강에 내려앉고 있다. 파리를 닮은 멜로디와 함께 이제사 파리의 풍경, 정취, 내음새, 감촉에 완연히 젖어드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파리에 왔구나. 들뜨고 신나는 기분은 아니다. 가슴 전체가 시리도록 아려오는, 옅은 햇빛을 머금고 느리게 흐르는 센 강 풍경처럼 처연하게 낭만적인 감정.


여기 파리에 있다. 심신의 아픔을 호소하며 휴가를 낸 기간, 병원을 뒤로하고 치유를 갈구하며 여행을 왔다. 센 강에 내려앉은 주황빛 햇살, 도시를 수놓은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 이국적이고 정감 있으며 온통 유적 같은 건축물로 둘러싸인 강변 풍경, 세월이 퇴적된 도시 삶터의 향기...... 이제사 파리가 제대로 보인다. 여행에서 위로를 갈구하고 있는 나의 처지가, 아련한 한 존재에 주어진 소중한 공간, 다시없을 시간, 그것들을 온전히 맞이한 이 순간을 가슴 시리게 뭉글해하며.



[다음 편에 계속: 발걸음 이어서 시테섬 왼쪽 끝 '베르갈랑 정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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