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 가능성과 무게
1.
나, me, I, 개인적 서사와 감흥이 없이는 눈길을 끌기 어려운 세상이다.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냄은 개성과 솔직함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다. 구호와 삶이 다른, 사회와 집단과 괴리하는, 부속과 분열을 넘는 자유로운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나의 세상! 흩어져있고 휘청거리고 꺾이고 편승하면서 또 일어서는 일말의 가능성. 분명 이전의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와는 구분되는 흐름으로 보인다. MZ세대 이야기가 분야를 막론하고 자주 나오는데, 이런 가능성의 범주들이 세상에 잘 안착해나갔으면 좋겠다.
2.
한편으로
개인, 단독자로 덩그러니 내던져진 세상은 무섭다. 특히 지금은 디지털, 익명, 가상의 주체로 범람하는 이중의 세상이다. 대면과 먼 관심을 받아먹으며 좋아요, 팔로워를 의식해야 하는 공간에서, 온전한 나를 얼마만큼 드러낼 수 있을까. 내면을 채우고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자기 브랜딩과 SNS를 통해 모든 개인에게 가능성이 열린 듯 보이는 세상은 기실 너무나도 공포스럽게 다가올 때가 있다. 스스로 유명해지세요. 기회는 많아요. 당신 옆의 평범하던 사람도 어느새 관심을 듬뿍 받는 인플루언서가 되었잖아요. 그러나 결국 널리 알려지는 명사나 인플루언서는 여전히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방식과 전략적인 스타일의 브랜딩이 ‘나’에게 잘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책임지고 짊어지고 눈에 띄어야 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 벌이고 닦달, 채근하고 탓한다. 정당하게 불타올랐던 나의 욕망은 수치심으로 돌아온다. 하찮고 부끄럽고 자책하는 쪽으로 뒤집힌다. 실패는 온전한 나의 부족과 책임으로 눌어붙는다. 누굴 탓하랴. 방패막이 하나 없이 처절하게 발가벗겨진 채로 홀로 세상을 부유한다.
3.
그리하여 상처 받은 영혼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그건 ‘나’의 결이자 스타일이기도 하다. 고독과 우수에, 감상적인 분위기를 탑재한 무언가에 지독히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T(thinking)보다는 F(feeling)에 치우친 성향과 살아온 환경과 습관이 맞물린 정서일 것이다. 어릴 적 난, 감수성에 예민하게 붙들렸다. 이성보단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조금만 감정이 자극되면 울컥했고 눈물도 많았다. 하릴없이 먼 산 쳐다보며 사색에 잠기거나 홀로 밤길을 걸으며 애상에 빠져들었다. 우산을 접어두고 비를 홀딱 맞으며 촉촉하게 걸었다. 짧은 노랫말 하나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고 보면 많이 메말랐다.
경쾌하고 밝고 따뜻한 것을 좋아하고 즐길 때도 있다. 고흐의 우울에 파묻힌 자화상보다 르누아르의 화려하고 샤방한 미가 보기 좋을 때도 있다. 애상 짙은 쇼팽의 선율보다 모차르트의 서정과 낭만을 들을 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반복해서 가슴을 잡아당기는 것, 슬픔의 정서가 없고서 나는 강렬한 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글도 음악도 그러하다. 갈팡질팡하면서도 천성적으로 유쾌하고 따스하며 튼튼한 내면이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응원하지만,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리며 표류하는 가녀린 영혼에 더 눈길이 간다. 그건 공감이기도 하고 나와 닮은 무언가에 대한 동류의식일 수도 있다.
동정과는 다르다. 연민과 비슷할까. 어찌 보면 가련히 여기는 마음만큼 관계를 묶고 지속시키는 감정이 또 있을까. 당신의 부족과 빈틈에서 다가가는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