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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Nov 22. 2021

기억 part.1

세계관 정리

1.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염병이었다.


2.

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환자는 피로감을 느낀다. 이 피로는 아무리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해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환자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치고, 가만히 있는 순간에조차 무기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환자의 신진대사율은 급격하게 증가한다. 맥박과 혈압도 소폭 상승한다. 식사량도 평소에 비해 많아진다. 그에 반해 환자의 체중은 거의 늘어나지 않는다.
세 번째 증상은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의 이름을 잘 떠올리지 못한다거나,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리는 등 증상은 초기 치매와 거의 다르지 않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러한 증상이 더 이상 심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환자들은 일상 생활에 불편을 호소하긴 해도 생활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다.

한편 이러한 증상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이 시기가 지나면 병의 증상은 급격하게 전환점을 맞이한다. 감퇴했던 기억력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는 회복이 아니라 상향이다. 이제 환자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억을 할 수 있게 된다. 길을 걸으며 보았던 모든 간판들의 이름, 사람들의 전화번호, 심지어 십수년 전에 보았던 시험 문제의 답안 번호까지 모두 기억한다. 이러한 기억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높아지며, 나중에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3.

병의 감염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하다. 최근 연구에서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이전까지는 병의 원인이 세균인지, 바이러스인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정확한 감염 경로까지는 특정하지 못했다. 공기 중의 호흡, 환자의 비말, 성관계 등 다양한 요인들이 후보로 고려되었지만 명확히 밝혀진 바는 아직 없다. 학자들은 보다 정확한 역학 조사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병의 점염성이 그리 높지 않아 감염 경로 특정에는 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4.

이러한 병의 이유를 두고 학자들 사이의 의견은 분분하다. 

첫 번째 가설은 기생충이었다. 인간의 몸에 신종 기생충이 침입했고, 이 기생충이 분비하는 어떤 특별한 물질이 인간의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생충설의 근거로 환자들의 늘어난 식사량과 신진대사율, 그에 비해 별로 늘어나지 않은 체중과 피로감을 들었다. 몸의 에너지를 기생충이 대신 흡수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고 휴식을 취해도, 체중과 피로가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료 장비를 활용한 스캔 결과 환자의 몸에서는 병을 일으킬만한 신종 기생충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이 가설은 자연스레 폐기 되었다.

두 번째 가설은 병의 원인이 분비한 어떤 물질이 뇌세포를 증가시킨다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 역시 폐기되었다. 검사 결과, 환자의 뇌세포 숫자가 일반 정상인과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가설은 병의 원인이 분비한 물질이 뇌의 활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인지과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 구조는 수많은 정보 마디와 이를 연결하는 선들로 이루어진 그물망 형태라고 한다. 이때 인간은 각각의 정보망을 활성화 시켜 필요한 기억을 꺼내 사용하는데 병의 원인이 분비한 어떤 특수한 물질이 이러한 활성화 과정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병에 걸린 환자의 뇌 신경 활동이 정상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뇌의 활동은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병의 숙주로 하여금 피로감을 안겨주고 많은 에너지 섭취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보다 상세한 사항들에 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현재 시점, 많은 연구원들은 이 세 번째 가설을 정설로 추정하고 있다.


5.

한편 사람들은 이 병은 이렇게 읽혔다. 기억력이 좋아지는 병. 누군가는 이건 병이 아닌 축복이라고 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병에 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치매 환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혹시라도 이 병이 치매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물론 병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열렬한 반응에 의구심과 우려를 보냈다.이 병이 정말 기억력만 좋아지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증상을 동반할 수 있는 지 아직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학자들의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병을 예찬하기 바빴다. 사람들 간 접촉을 최소화하고 마스크를 써달라는 정부의 지침은 가볍게 무시되었다. 사람들에게 이건 병이 아닌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6.

한편 모월 모일,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남겨진 가족들과 그들의 주변 지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두 부자의 사이가 결코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망연자실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은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었다. 아들은 자신의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모든 벌을 달게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 덕분에 수사부터 기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편 이 사건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사건의 범인이 병의 환자라는 것이었다. 재판에서 아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실 그 가족은 오래 전 사업 실패로 큰 고통을 겪었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만들었고, 그렇게 피어난 절망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랬다. 가정 폭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사업은 차츰 회복세를 보였고 가족에게는 다시 부와 평화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자신의 지난 과오를 가족들에게 사죄했고, 가족들은 그 사과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이후 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으로 평생을 살았다. 폭력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막대한 사랑을 가족들에게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이 아들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이후 병의 절차에 따라 아들의 기억력은 급격하게 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렇게 좋아진 기억력이 어두운 과거도 함께 끄집어 냈던 것이었다.

아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주 악몽을 꿨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때리던 순간이 꿈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다. 이에 아들은 그 기억을 애써 외면하고 피하려 했지만 기억은 그럴수록 끈덕지게 달라붙어 아들을 괴롭혔다. 이제 그는 원치 않는 순간에조차 그날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기억이 반복될수록 지나간 과거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흔히들 기억은 사건과 감정의 결합체라고 한다. 폭행 당한 사건은 그 순간의 두려움, 분노, 수치심도 함께 상기시킨다. 이후 아들의 마음속엔 증오가 자라났다. 증오는 기억이 가져다주는 사건과 경험을 받아 먹으며 그 몸집을 더욱 불렸다. 그리고 그 증오는 마침내 그의 아버지까지 잡아 먹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너무 무섭고 미웠으니까요.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서는 그 지옥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어요." 법정에서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재판관은 그런 아들에게 아직 아버지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아들은 긴 한숨을 쉬다 대답했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판사는 아들에게 징역 대신 치료감호를 선고했다. 검사측도, 피고측도 항소는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아들이 Z시의 한 치료감호소로 이동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7.

이후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삼갔다. 그 병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보다 체계적인 수용안을 만들어 내놓았다. 치료제는커녕 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지금 최선의 방법은 환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환자는 증상의 심각성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나뉘었다. 1단계는 아직 기억력 상승이 동반되지 않은 환자들이었다. 이들에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간단한 검진을 받는 것 외에는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2단계는 기억력 상승이 시작된 사람들이 해당 되었다. 이들에겐 주 2회 검사와 상담 치료가 동반되었다. 갑작스레 높아진 기억력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불안, 과민증상 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3단계에 이르면 환자들은 예외없이 전문 병동에 수용되었다. 정신병동 내에서 이뤄지는 치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이전의 사건 사례를 감안하여 높은 수준의 정신과 치료 및 상담 치료가 병행될 것이라는 예측성 기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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