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한 명만 꼽아보라면 주저하지 않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꼽는다. 첫 장편 데뷔작이었던 <환상의 빛>을 시작으로 최근의 <브로커>까지.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았던 <디스턴스>를 제외하면 그의 작품은 모두 본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걸까? 물론 해외 영화제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도 많은 팬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흥행 파워를 지닌 감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개봉 계획조차 잡혀있지 않은 그의 신작을 벌써부터 기다린다. 도대체, 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인물들이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야기 전개의 편의를 위해 선과 악 이분법의 구도로 설정된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가령 <걸어도 걸어도>에서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목숨을 바쳐 구한 요시오가 별 볼일 없는 직업을 가진 청년이 되자 저런 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며 한탄한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요시오에게 내내 친절하던 어머니도 아들의 기일마다 찾아와야 하는 요시오가 괴로워 보인다며 그만 부르자는 주인공의 말에 ‘그래서 부르는 거야’라며 조용한 속내를 드러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또 다른 작품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료타는 경제적인 이유로 아버지의 유품을 훔치는가 하면, 그렇게 번 돈을 도박으로 모두 날린다. 아내와의 약속에도 매번 지각을 하고, 아들에게 신발을 사주기 위해 일부러 흠집을 내고 가격을 흥정한다. 직원들을 살뜰히 챙기던 료타의 직장 상사는 조사 일수를 부풀려 더 많은 금액을 고객들에게 뜯어내고, 료타의 부하는 그런 상사를 속여 중간에 돈을 가로챈다. 하물며 사람 좋아 보이던 료타의 어머니조차 아무도 보지 않을 땐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린다.
이렇듯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인물들은 완전히 선하지도, 그렇다고 악하지도 않다. 여기에는 선(善) 뿐만 아니라 적당한 악(惡)도 포용하려는 넉넉한 관용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소한 악을 기꺼이 수용했듯 우리가 ‘패자’라고 부름직한 인물들을 끌어안으려는 공동체의 이상을 드러낸다.
그 증거가 바로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한 장면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 코이치는 소원을 빌려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소원을 빌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의 바램대로 화산이 터지면 코이치의 가족은 재회하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흩어질 가족, 고통받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는 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신의 꿈을 이루고,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 속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런 메시지는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없는 세상의 현실에 주목하고, 설령 되고 싶은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실제로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시나리오를 쓰기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첫 장에 이런 문장을 썼다. “모두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의식이라도 하듯 그는 영화에 이런 대사도 함께 끼워 넣었다. ‘어쨌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어.’ <태풍이 지나가고>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좇는 한심한 아들을 향해 던진 어머니의 다정한 위로를 말이다.
한편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비트코인이다. 최근 잠시 열풍이 잦아들긴 했지만 요 몇 년 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최근 루나 사태를 겪으며 가상 화폐에 대한 관심은 다시 크게 늘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열풍이 썩 달갑지는 않다. 물론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도박에 가까운 확률에 기대어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가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싶다. 진정으로 건전한 사회라면 성실한 노력만으로도 본인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돈은 노동으로 벌어야 한다. 돈으로 돈을 버는 건 만연한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뿐이다. 결국 가상화폐로 돈을 버는 건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다.
<트렌드코리아 2018>은 2017년의 'YOLO'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욜로 라이프의 등장에는 안정적인 내일을 보장받기 힘들다는 기대감 상실에서 본능적으로 나온 삶의 방식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아마도 비트코인에 관한 사람들의 열망 역시 YOLO의 배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도박에 기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도박으로 해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대신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성실하게 노력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꿈꾸고 보답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오늘날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이 둘의 조합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시민이 주인인 사회, 자유가 보장되고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사회.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본인의 능력에 따라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사회. 정말 이상적인 사회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의 실제 조합은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문장에서 ‘노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다시 말해 우리들은 삶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고, 고쳐 사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발생하진 않는다. 가령 산사태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표면적으로는 갑작스러운 폭우가 원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혹은 부실한 방재시설도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깊게 살펴보면 무분별한 벌목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폭우를 야기한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모든 문제의 원인은 복합적이기에, 개인부터 사회 구조에 이르기까지 그 원인을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변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이제껏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조합의 민낯을 들여다보자.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이며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다. 그 사회에서는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한편 자본주의는 그 특성상 필연적으로 ‘경쟁’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에는 승리자도 있겠지만 패배자도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냉정한 현실을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 달콤한 환상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문장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노력’이 아니라 ‘수’다. 이 문장의 진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노력은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다고 내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는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이야기하다가 학생들로부터 ‘날로 정규직이 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반응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는 몇 년 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말에 분노하던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똑같이 재연되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마 나도 비슷한 입장이었다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취업 준비생들이 책상 앞에서 보낸 시간들만큼이나 비정규직 직원들이 발로 뛰어온 시간들도 소중하다. 소위 말하는 학벌이, 스펙이 낮다고 해서 그들의 노력이 당연한 취급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드라마 <송곳>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패배는 죄가 아니다.’,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더 좋은 대학을 간 사람이, 더 많은 스펙을 지닌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경쟁이 지닌 일종의 순기능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덜 좋은 대학을 갔다고 해서, 남들보다 초라한 스펙을 가졌다고 해서, 그래서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기회조차 위협받아서는 안 된다. 구고신의 말마따나 패배는 죄가 아니니까.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니까. 실패했다면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주어져야 한다. 겉보기엔 작은 노력일지라도 그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낙오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품어주는 넉넉한 사히.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통해 바라본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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